『엄마의 기쁨』 구글리엘모 조치(연도미상)
『엄마의 기쁨』 구글리엘모 조치(연도미상)

지난 주 연재에서 마음 속 아이는 자아 이미지가 형성되는 어린 시절, 부모님, 학교선생님 등과 같이 권위적 존재에 의하여 결정적 영향을 받는다고 소개하였다.

환자와 대화 중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상처 경험을 들을 때마다 담당의사로써 가슴이 먹먹해 진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환자에게 상처를 준 부모님도 본인의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비슷한 경험을 당한 경우가 적지 않다.

당사자들은 그와 같은 연계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쉽지 않지만 마치 사슬 고리처럼 세대로 이어지면서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이번 연재는 지난 주 주제와 비슷한 맥락으로 적 존재 엄마에 대한 내용이다.

그림 엄마의 기쁨에서 요람 속 아기가 번쩍 들려 엄마 무릎 위에 세워졌다. 다리 힘이 아직 충분치 않은 아이는 엄마의 두 팔에 의지해 간당간당 서 있다.

억지로 일 세워져 힘겹게 서 있는 아기는 화가 잔뜩 날 법한데, 얼굴 표정은 전혀 딴판이다. 온 얼굴에 즐거움이 가득하고, 까르륵 웃음소리가 마구 터져 나온다. 전신에 충만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양 팔을 마구마구 흔들어 댄다.

바로 코앞에서 아기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엄마는 아기의 귀여운 몸짓에 양볼 화색 충만하고 크나큰 희열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엄마와 아기 사이에는 주변 탁자 화분의 화사한 꽃들처럼 알록달록 기쁨이 한창이다. 창문 밖 서성대던 나무 꽃들은 거실의 밝은 웃음소리에 놀라 화사한 얼굴을 들이밀고는 궁금한 듯 두리번두리번 출렁거린다.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 노엘 할레 (1779년)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 노엘 할레 (1779년)

그림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에서 두 여인이 대화 중이다. 화려한 옷으로 차려 입은 오른쪽 여인이 무릎 위 보석함 속 보석을 꺼내 소중히 쥐고는 건너편 여인 코르넬리아에게 다소 거만하게 물어본다.

당신의 보석은 어디에 있나요?” 이에 소박한 옷을 걸친 코르넬리아는 옆에 있는 아이들을 귀중히 쓰다듬으면서 대답한다.

나의 보물은 바로 제 옆에 있는 이 아이들입니다”. ‘코르넬리아는 옛 로마 시대의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이다.

어머니 코르넬리아로부터 보석처럼 귀한 존재로 여겨지고 키워졌던 그라쿠스 형제는, 인품과 신망이 높은 정치가로 성장하였으며 사후에도 로마의 광장에 형제의 조각상이 만들어지는 등 시민들의 경배와 칭송을 받았다.

그림 엄마의 기쁨처럼 기쁨 충만한 엄마의 표정을 자주 경험하고, 그림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처럼 엄마에게 귀한 존재로 인정받은 경험은 아이의 자존감 형성에 너무나도 중요하고 절대적이다.

다음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이무석의 책 나를 사랑하게 하는 자존감에 소개된 내용이다.

엄마는 아이의 거울이다. 그래서 엄마를 반사 자기 대상이라고 부른다. 엄마가 아이를 예뻐하고 좋아하면, 아이는 자신이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자존감이 생긴다.

반대로 아이가 사랑받지 못하고 천대받으면, 아이는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낮은 자존감을 갖게 된다. ‘코허트박사는 이런 자존감을 마음의 핵심이 금간 상태라고 했다.

이런 사람들은 금이 간 유리그릇처럼 작은 충격에도 자아가 쉽게 부서지고 만다. 조금만 비난을 받아도 자존심이 상하고, 자기를 싫어하는 눈치가 조금만 보여도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어 진다. 낮은 자존감 때문이다. 이렇게 자존감은 엄마에게 달려 있다.”

『엄마의 기쁨』 데이비드 아돌프 콘스탄트 아츠 (1868년)
『엄마의 기쁨』 데이비드 아돌프 콘스탄트 아츠 (1868년)

식탁 의자에 앉은 엄마가 좀 떨어진 곳의 아이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 방금 간식을 다 먹은 듯 식탁 위 접시 2개가 모두 비었다.

마루 바닥에 털버덕 주저앉은 아이는 한쪽 양말을 잡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심히 가다듬는다. 다른 쪽 양말은 바로 앞에 팽개쳐 두고는, 아이는 스스로 양말을 신어 보려고 나름 혼신의 힘을 기울여 노력 중이다.

붉은색 보자기로 머리를 둘둘 말아 올린 엄마는 의자 등받이가 안 보일 정도로 깊숙이 자리잡고 앉아 오른손으로는 턱을 괴고 왼손은 무릎에 여유롭게 얹혀 놓고는, 아이의 모든 행동을 찬찬히 살펴본다.

양 발의 끝은 아이를 향하지 않았고, 그나마 한 발은 받침대에 올려 놓았다. 결코 조급하게 서두르거나 아이를 달달 보채지 않고, 아이의 꼼지락꼼지락 행동을 느긋하게 관찰하면서 끈기 있게 기다린다.

림의 제목 엄마의 기쁨처럼 엄마는 어린 딸이 엄마의 도움 없이 스스로 양말을 신으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귀엽고 흐뭇하고 또한 대견하다.

아이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림 엄마의 기쁨처럼 미숙한 아이의 행동에 부모가 조급하게 개입하지 않고 아이를 믿고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아이가 본인 스스로 이룬 성취감을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역시 책 나를 사랑하게 하는 자존감에 소개된 내용이다:

인간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사람은 엄마라는 존재다. 엄마와 살면서 아이는 수백 번도 넘게 긍정적 경험부정적 경험을 반복한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서 자존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이를 천대하고 구박하는 엄마도 문제지만 불안하고 조급한 엄마도 문제다.

조급한 엄마는 아이가 문제를 풀 때까지 웃으며 여유 있게 기다려 주지 못한다. ‘아이구, 답답해!’하고 비난하거나 대신해 줘 버린다. 이것은 과잉보호다. 이런 부모를 둔 아이는 스스로 문제를 풀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을 느낄 수가 없다.

성취감을 엄마에게 번번이 빼앗겨 버리기 때문이다. 자존심의 중요한 요소가 자기 능력에 대한 자신감인데, 이런 아이는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질 수가 없다. 점점 의존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다.

문제에 부딪히면 엄마의 눈치만 본다. 아이가 이럴수록 조급한 엄마는 더욱더 조급 해진다. 더 과잉 보호하게 되고 아이의 자존감은 더 낮아진다. 악순환이다

『못된 엄마들』 조반니 세간티니 (1894년)
『못된 엄마들』 조반니 세간티니 (1894년)

온 사방이 허연 눈이 뒤 덮인 한 겨울, 전체 풍경이 황량하고 을씨년스럽다. 춥고도 모진 계절의 한 가운데 잎새 하나 없이 거무죽죽하게 탈색된 나무 몇 그루가 힘겹게 서있다. 그 중 한 나무에 마치 누에고치처럼 매달린 여인과 아이가 있다.

그림 『못된 엄마들』 부분
그림 『못된 엄마들』 부분

그림 제목 못된 엄마들로 미루어 보면 여인은 엄마이고 아이는 자식이다. 아이는 엄마의 젖을 물고 있는 데 결코 엄마의 따스하고 달콤한 젖을 황홀히 즐기는 얼굴이 아니다.

아이는 분노가 넘치고 넘쳐 울혈되어 나타나는 청색안青色顔이다! 아이 성장의 결정적 시기에 부족했던 엄마 사랑의 굶주림이 분노로 응집되어, 이빨 날카롭게 세워 엄마의 젖꼭지를 얼굴이 사색으로 변할 정도로 야무지게 물어 댄다.

마치 고치 같은 자신만의 이기적 공간 속으로 침잠하려던 엄마! 앙칼지게 물어 대는 아이의 젖 빨기로 육체고통이 심하련만, 지난 시절 자신이 아이에게 저질렀던 업에 짓눌린 듯 두 눈 꾹 감고 고개 돌려 애서 외면한다. 그림의 부제는 아마도 엄마 사랑 결핍증 청색안 아이!’일 듯하다.

다음은 책 역동정신의학(Glen O. Gabbard , 하나의학사, 2008)에 소개된 내용이다.

"어렸을 때에 변덕이 심하고 일관된 양육환경을 제시해 주지 못하는 어머니에게서 자란 사람은, 항상 불안정하고 이상화와 평가절하를 반복하는 대인관계를 반복하게 된다.

정작 자신은 왜 공허하고 대인관계에서 허전함을 느끼는지 잘 모른다. 이 사람의 무의식에는 어릴 적 불안정한 양육환경으로 파생된 타인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지만, 의식에서는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여자의 세 시기』 클림트 (1905년)
『여자의 세 시기』 클림트 (1905년)

그림 여자의 세 시기에서 어린아이로써의 여자, ‘엄마로써의 여자 그리고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의 피할 수 없는 노화현상으로 수분 빠져 쭈글쭈글한 노파의 세 여자가 등장한다.

세 여자 중 노파는 다른 두 여자와 사뭇 다르다. 노파는 몸을 옆으로 돌려 세웠고 차마 들지 못한 고개는 꺾여져 있고 얼굴 전체도 손과 긴 머리로 몽땅 가렸다.

아마도 지난 세월 무지와 오만으로 저질렀던 행태에 대한 회한으로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낼 염치가 없는 듯하다. 바로 앞 엄마와 아이를 본 노파는 자신의 내면을 향하여 절규한다.

"엄마였던 저 성스러운 시절을 내가 왜 그렇게 우매하고 거만하게 보냈었나? 지난 세월 나의 어리석음이여!"

그림 『여자의 세 시기』 부분
그림 『여자의 세 시기』 부분

그림 여자의 세 시기에서 엄마는 자신의 존재이유는 자신이 아니고 안고 있는 아이이며, 그 일이 지극히 귀하고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활짝 열어 당당히 정면을 향한다.

엄마와 아이의 피부가 노파와 다르게 한 색조이고, 편안하게 감은 눈이 한 모습이고, 큰 만족으로 다문 입이 한 모양새이고, 기분 좋은 이완에 졸린 표정이 하나이고, 맨 살로 서로 껴안은 몸은 경계 없이 하나이다. 그림 여자의 세 시기에서 아기와 엄마는 몸과 표정이 하나이다

아이는 태생학적으로 아빠 유전자(xy)와 엄마 유전자(xx)를 공유한다. 아빠 및 엄마 유전자의 성스러운 조합 과정을 통하여, 아이 몸의 기본 설계도가 만들어진다.

그 설계도에 의거하여 아이의 앙증스러운 몸이 만들어지는데, 주목할 사실은 아이 몸을 만드는 물질의 100% 전부를 엄마에게서 받는다.

, 엄마와 아이 몸의 물질적 성분은 동일하다. 그리고 엄마는 아이를 출산하기 전 약 10개월 동안 몸 속에 품고는, 둘이 아닌 하나, 즉 한 몸으로 지낸다. 그러한 과정을 지나면서 엄마와 아이의 몸은 물질적 모든 성품이 하나가 된다.

물질의 미시세계를 설명하는 양자 물리학에 의하면, 모든 물질은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지닌다. 엄마 살점을 떼어 아이 몸을 만드니, 엄마와 아이 몸의 구성입자가 동일하다.

그리고 아이와 약 10개월간 한 몸으로 지내니, 리듬과 패턴 즉 파동도 하나가 된다. 결국 물질로 이루어진 엄마 몸과 아이 몸은 (다소 비약하여 해석하면) 입자와 파동이 똑같다.

10개월 후 엄마 몸을 떠나 세상에 나온 아이는, 비록 몸은 공간적으로 엄마와 떨어져 있지만 아이 몸의 물질 특성상 항시 엄마와 공명한다. 그리하여 엄마 몸의 변화를 초래하는 엄마 마음(감정)의 변화는, 물질적으로 엄마와 하나인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엄마의 감정이 불안, 걱정, 분노, 두려움 등으로 흔들릴 때마다 감정과 직결된 엄마 몸이 흔들리고, 그리 되면 엄마 몸과 공명하는 아이 몸이 흔들리고 결국에는 아이 몸과 직결되어 있는 아이 감정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만약 아이가 어떤 상황에 의하여 감정이 흔들리더라도 엄마가 감정의 흔들림 없이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으면, 그러한 엄마의 몸짓이 아이 몸과 공명하여 아이의 감정을 고요하고 안정하게 만든다. 엄마와 아이는 하나다.

『젊은 엄마』 가리 멜쳐스 (1892-1895년)
『젊은 엄마』 가리 멜쳐스 (1892-1895년)

엄마의 무릎에 덮치듯이 안긴 아이가 양손을 엄마에 맡겨 놓고 고개 들어 엄마를 쳐다본다. 순간적으로 놀란 듯 아이의 입은 벌려졌고 볼도 벌겋게 상기되었지만, 엄마를 향한 표정에는 경이로움과 경건함이 묻어 난다.

봄철 새싹처럼 밝은 연두색 상의에 페이즐리 무늬의 망토를 걸친 엄마는 등을 곧추 세우고 머리는 약간 앞으로 기울이고 홍조 띤 얼굴의 눈은 살포시 감았다.

손으로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쥐고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기도하는 듯 흔들림 없이 단아하게 앉아 있다. 그러한 자세의 엄마는 벽면 가구 위 기호 문형이 새겨진 금색 바탕의 접시와 어울려져, 마치 금빛 후광後光에 휩싸인 것처럼 경이롭다.

그림 『젊은 엄마』 부분(좌) 및 『최후의 만찬』 사이먼 우샤코프 1685년 (우)
그림 『젊은 엄마』 부분(좌) 및 『최후의 만찬』 사이먼 우샤코프 1685년 (우)

그림 젊은 엄마에서 표현된 후광은 그림 최후의 만찬처럼 종교화에서는 '성인聖人'의 머리를 감싸는 밝은 빛이다.

후광은 기독교 및 천주교에서는 성령,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불보살을 의미하는데, 그림 젊은 엄마에서 엄마는 후광이 빛나는 '성인'으로 묘사되었다. 엄마는 아이가 건강한 자아상을 지닌 인간으로 거듭나게 돌보아주고 이끌어 주는 '성인'이다.

아이의 성장에 엄마의 존재는 너무나도 막중하고 또한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엄마는 아이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만들어 주고, 아이가 일평생 지니게 될 사랑과 행복의 기억과 경험을 잠재의식(무의식)에 차곡차곡 담아 주는 '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월간 정토지(20076월호)에 법륜스님의 글 <가족의 힘과 행복을 품고 있는 그 이름, 어머니>가 게재되었는데, 세상의 엄마들께서는 전문을 꼭 읽어 보기를 권한다. 다음은 그 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애한테 엄마의 존재는 신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여자가 인간이지 엄마는 인간이 아닙니다.

아이한테 엄마는 신이에요. 여신女神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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