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편집 덕분으로 인류는 수확량이 더 많은 곡물, 더 건강한 가축, 더 영양가 많은 식료품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지금 사람의 장기이식용으로 쓰일 유전자 변형 돼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앞으로는 털이 복슬복슬한 코끼리(매머드)나 날개달린 도마뱀, 뿔 없는 소, 뿔 달린 말(유니콘)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크리스퍼 혁명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이 혁명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구 생명체의 역사에서 지금 우리가 새로운 시대의 전환점에 와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모든 생물체의 유전자 조성을 자연이 아닌 인류가 통제하는 전대미문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돼지는 해부학적으로 인간과 유사점이 많다. 난청 증후군, 파킨슨병, 면역질환 등에서 주목되는 인간 질병 모델이기도 하고, 인간 단백질 치료제 같은 유용한 약물을 생산할 수도 있다.(사진은 서울의대 생명동물자원연구센터에서사육 중인 SNU무균미니돼지의 모습)
돼지는 해부학적으로 인간과 유사점이 많다. 난청 증후군, 파킨슨병, 면역질환 등에서 주목되는 인간 질병 모델이기도 하고, 인간 단백질 치료제 같은 유용한 약물을 생산할 수도 있다.(사진은 서울의대 생명동물자원연구센터에서사육 중인 SNU무균미니돼지의 모습)

실험동물 모델 개발과 크리스퍼

의생명과학자들은 사람의 삶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유전자 편집 실험동물 모델을 꾸준히 개발해왔다. 그 이유는 특정 질병의 유전적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약 효능을 평가하기 위해서, 혹은 의료기술의 효율성을 검증하기 위해서 등 여러 가지이다.

유전자 편집 원숭이: 2014년 중국 연구팀은 단세포 배아에 크리스퍼를 주입하여 유전자 편집 필리핀 원숭이를 만들었다. 연구팀은 크리스퍼가 동시에 유전자 두 개를 표적화하도록 프로그래밍했다. 하나는 중증 복합형 면역부전증 관련 유전자이고, 다른 하나는 비만 관련 유전자이다. 이와 유사한 모델은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있다.

이종이식용 돼지: 해부학적으로 인간과 유사점이 많은 돼지는 난청 증후군, 파킨슨병, 면역질환 등에서 주목되는 인간 질병 모델이다. 인간 단백질 치료제 같은 유용한 약물을 생산할 수도 있다. 크리스퍼로 돼지 유전자를 사람 유전자로 대체해서 치료용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은 2015년에 입증됐다. 또한 사람에게 이식할 수 있는 이종이식용 장기를 생산할 수도 있다. 놀라울 정도로 사람과 크기가 비슷한 돼지 장기는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조만간 이식 장기가 절대 부족한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용(애완용?) 마이크로 돼지: 2015년 중국 베이징게놈연구소(BGI)는 유전자 편집으로 마이크로 돼지를 만들었다. 성장호르몬에 반응하는 유전자를 잘라내어 발육을 저지시킨 것이다. 실제 돼지 무게는 90kg 이상인데 비해 마이크로 돼지는 약 13kg, 중간 크기의 개 정도밖에 안 된다. 본래 파킨슨병 모델의 연구용으로 만들어졌지만, 애완동물로 판매되기도 했다.

근육량 강화한 비글: 2015년 중국 광저우 과학자들은 크리스퍼를 이용해서 개의 근육 강화에 영향을 미치는 마이오스타틴 유전자를 제거하여 근육량을 강화한 비글을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 연구용이라지만, 경찰과 군대에서는 근육 강화 개로 이용할 수 있다.

사람 질병의 치료예방과 크리스퍼

이제 우리는 7,000여 종류의 인간 유전질환 중에서 하나의 돌연변이로 생기는 몇 가지 종류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됐다. 환자 조직 표본에서 유래한 인간 세포를 배양해서 유전질환과 연관된 DNA 돌연변이를 크리스퍼로 교정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DNA 염기가 잘못됐든, 염기가 삭제 혹은 삽입됐든, 비정상적 염색체 때문이든 단일 유전자의 오류라면 크리스퍼는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질병 치료를 위한 유전자 편집 기술에서 중요한 난제는 크리스퍼를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는 것이다. 전달 전략으로는 생체내(in vivo) 유전자 편집생체외(ex vivo) 유전자 편집이 있다. 지금 단계에서는 크리스퍼를 직접 환자 몸속에 주입하여 몸 안에서 편집하는 생체내 치료보다 환자 세포를 몸 밖에서 편집한 뒤 다시 몸속으로 집어넣어주는 생체외 편집이 더 간편하다. 또한 편집된 세포를 몸속에 넣어주기 전에 철저하게 품질관리 시험을 거칠 수 있어 안전 측면에서도 유리하다.

생체외 유전자 편집 치료법: 이 방법은 혈액질환 치료에 적합하다. 우선 헤모글로빈 분자의 결함으로 생기는 겸상적혈구빈혈과 베타지중해성빈혈이 가장 유망해 보인다. 헤모글로빈 분자 결함은 베타글로빈 유전자의 돌연변이 때문이다. 환자의 골수에서 줄기세포를 분리하여 베타글로빈 유전자 돌연변이를 크리스퍼로 교정한 뒤 편집된 세포를 환자에게 다시 넣어주면 된다. 기존 골수이식 때의 면역거부반응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편집된 환자의 세포가 건강한 헤모글로빈을 대량생산한다는 증거는 이미 많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도 생체외 유전자 편집의 유효한 표적이다. 백혈구 세포 표면에 CCR5 단백질을 암호화한 유전자에 DNA 염기 32개가 없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HIV에 감염되지 않는다. HIV가 세포에 침입하는 첫 단계에서 결합하는 단백질이 CCR5이기 때문이다. 염기 32개가 삭제되면서 CCR5가 생산되지 않아 HIV가 결합할 곳이 없어진 것이다.

CCR5 유전자를 최초로 편집한 기술은 제1세대인 징크 핑거 뉴클레이즈였다. 이보다 뒤에 나온 크리스퍼는 HIV 제거를 목표로 몇 가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하나는 크리스퍼를 프로그래밍하여 HIV의 유전물질을 표적화하도록 함으로써 감염성 DNA를 잘라내어 환자의 세포에서 HIV를 제거하려는 시도이다. 비활성화된 크리스퍼를 이용해서 휴면기에 든 바이러스를 의도적으로 깨워 기존 약물의 표적이 되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

생체내 유전자 편집 치료법: 이 치료법을 적용하려면 면역반응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해당 유전자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조직에 크리스퍼를 집어넣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문제는 바이러스 벡터의 도입으로 해결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데노연관바이러스(AAV)가 많이 쓰인다. 이 바이러스는 캐스9와 가이드 RNA를 암호화한 치료용 유전자를 쉽게 삽입할 수 있고, 전달 효율도 높다.

크리스퍼가 생체내(생쥐 모델)에서 유전질환 증상을 개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가장 극적인 조직은 근육이었다. 2015년 말에 근육위축증을 앓는 성체 생쥐에 크리스퍼를 집어넣은 뒤 질병 증상이 완화될 수 있음을 여러 연구실에서 보고했다.

크리스퍼를 집어넣은 AAV 벡터를 생쥐 근육에 주사하거나 혈액을 통해 근육 조직에 전달했을 때 정상 디스트로핀 유전자가 활성화됐으며, 쥐의 근력이 상당 정도 증가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유전자 편집을 통해 타이로신혈증의 원인인 생쥐의 유전자 돌연변이를 치료하여 손상된 유전자를 복구하고 질병 진행을 억제시켰다는 연구도 2016년에 나왔다.

AAV는 크리스퍼를 성체 생쥐의 뇌나 폐, 눈의 망막세포에도 전달할 수 있다. 헌팅턴병, 낭포성섬유증, 선천성 시각장애 등의 유전질환을 치료할 잠재력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암 유발 돌연변이와 크리스퍼

암을 유발하는 주요 돌연변이는 병리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많은 돌연변이 속에 파묻혀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암 유발 변이인지 옥석(玉石)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100만분의 1이라는 희박한 비율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세포를 어렵사리 찾아내거나, 원하는 생쥐 모델의 후손을 몇 년씩 키워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크리스퍼를 이용해서 아주 짧은 기간에 훨씬 적은 비용으로 돌연변이 모델을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암의 유전적 요인을 찾아내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백혈병 유발(억제) 유전자 돌연변이 탐색: 2014년 하버드의대 연구팀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유발하는유전자 돌연변이를 찾기 위해 크리스퍼를 프로그래밍하고 후보 유전자 8개에 맞는 가이드 RNA를 만들어 유전자들을 편집한 뒤에 이 세포를 생쥐의 혈액에 투여했다. 그리고 어떤 생쥐에서 백혈병이 발생하는가를 관찰했다. 이전에는 이처럼 많은 유전자를 한꺼번에 편집하는 일을 상상할 수 없었다.

MIT 데이비드 사바티니 교수는 게놈 전체를 대상으로 녹아웃(knockout) 검사를 한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2015년 이 연구팀은 하버드의대 연구팀과 달리 암을 억제하는유전자 돌연변이를 탐색했다. 백혈병과 림프종의 감수성과 관련된 유전자를 찾던 이 연구는 항암화학요법 약물의 유망한 표적을 발견했다.

암 면역치료법을 보조하는 크리스퍼: 유전자 편집 기술은 암과의 전쟁에서 면역치료법을 보조할 수 있다. 이 치료법의 핵심은 사람의 면역체계, 특히 T세포를 수정하는 것이다. T세포가 암세포 분자를 인식하도록 재구성하면 면역반응을 통해 암세포를 제거하도록 도울 수 있다. 이런 방법 중의 하나가 입양세포이식(adoptive cell transfer)이다. T세포를 조작하여 특정 암을 표적화하도록 하는 이 방법에 유전자 편집 기술이 이용되는 것이다.

유전자 편집이 더욱 발달하게 되면 암 면역치료법은 기성의 치료법이 될 것이다. 특정 암세포를 겨냥한 유전자 편집 T세포가 만들어지면 그 암에 걸린 환자들은 일률적으로 그 세포를 주입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임상시험은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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