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관광의 도시, 서울특별시 강북구는 <강북으로의 특별한 여행>이란 강북구 안내 책자를 펴냈다. 북한산 기슭에 위치한 강북구는 공원 녹지 면적이 구 전체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서울시 25개 자치구 가운데 녹음이 가장 우거져 있는 고장이다.

북한산 국립공원, 북서울 꿈의 숲, 솔밭근린공원, 오동근린공원 등 천혜의 자연환경과 3.1만세운동의 발원지 봉황각, 건국의 초석을 다진 순국선열, 애국지사 16위 묘역, 그리고 민주화의 성지 국립 4.19민주묘지 등 대한민국 근대사의 역사가 담긴 문화유산은 강북구의 소중한 재산이다. 강북구는 역사문화 관광도시의 기치를 내걸었다. ‘희망 강북’은 브랜드 슬로건이다. 소나무가 구(區) 나무다.

지하철 1호선 광운대역 1번 출구를 나와 월계근린공원, 초안산, 우이천을 지나 북서울 꿈의 숲을 찾아가는 트레킹 코스를 다녀왔다.

월계근린공원은 영축산(97m), 초안산(114m), 북서울 꿈의 숲(오패산), 오동근린공원(월곡산)의 시발점 광운대학교 뒷산 영축산을 오르는 길 찾기가 쉽지 않았다. 광운대역은 옛 성북역이었다. 성북역은 서울이 넓어지면서 노원구, 강북구 등이 생기면서 성북구에서 밀려나 이젠 노원구 쪽에 치우치니 광운대역이 되었다. 광운대학교 역시 성장을 계속하여 지금 역 주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광운대역을 나서면서 큰 건물, 신한은행과 좀 떨어진 국민은행을 찾고, 성북유치원을 기준 삼아 꽃가게를 돌아 올라갔다. 신도브래뉴아파트 101동과 102동 사이 경비실을 돌아 올라선다. 산쪽으로 연결된 길에는 생태 탐방표식기가 방향타다 갈림길,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 능선을 향해 나무계단길을 걸어 올라가면 군부대 철조망을 만나 우회하여, 다시 정상군부대 철조망 따라 우측으로 우회하여 철조망이 끝나는 동쪽 끝 갈림길을 지나간다.

상궁묘소, 상궁화산천씨 묘비, 김씨 묘,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김씨묘비가 여기저기 보인다. 온전한 묘가 보이지 않는다. 능선따라 운동기구, 의자들이 있고 타이어 계단, 전망바위, 접근금지 철조망도 만난다. 베드민턴장, 영축산 운동시설에 정자도 있다.

영축산의 성천봉(聖泉峰) 표지석은 산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다. 산기슭은 큰건물 건설현장이 들어섰다. 묘지들의 흔적 찾아 돌아다니다 산에서 내려오면 큰길을 만나고, 월계문화정보도서관, 월계 주공아파트 단지, 롯데캐슬 아파트, 염광여고, 월계중학교, 월계고등학교 등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초안산 입구를 찾아간다. 지난 토요일 오후 사전답사를 했을 때는 신계초등학교, 대우아파트 단지를 지나면서 뒤를 돌아보니 영축산이 보였다.

초안산은 인덕대학교 뒷산이다. 일요일 성원교회를 찾아가는 길은 신도들로 보이는 할머니들을 따라가니 초안산 입구를 쉽게 찾아갔다. 초안산 출입구를 지나면 또 철조망이 반긴다. 초안산 자락엔 학교들의 분획 철조망이 세 방향으로 늘어섰다. 초안산 입구에는 넓은 바위지대가 있다.

인덕대학교 뒷산, 초안산 줄기는 매봉산(103.5m)이다. 초안산 근린공원 출입구는 청백아파트 방향 출입구 근처에 초안산 근린공원 안내도가 있다. 초안산(楚安山?114m)에는 내시들을 비롯해 양반과 서민 등 조선시대 분묘 1,000여 기가 있다. 특히 이곳에는 조선시대 궁중의 여러 업무를 담당하던 내시부(內侍府)의 관원인 내시의 분묘가 모여 있다. 따라서 초안산은 ‘내시내산’이라고도 불렀다.

기록에 따르면 내관을 지낸 김계한(金繼韓)과 그의 아들 김광택(金光澤)의 묘가 있었는데 오래전에 이를 양주 효촌리로 옮겼다. 이곳에 남아있는 내시묘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은 김계한의 손자 승극철(承克哲)의 묘인데 묘지의 건립연대가 1634(인조12)이다. 내관들은 양자(養子)로 대를 잇기 때문에 손자의 성이 다르기도 하다. 이곳에 있는 내시의 묘들은 대부분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초안산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지만 죽어서도 궁궐을 바라보며 왕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일제강점기까지도 마을 사람들이 매년 가을 이곳에서 내시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이곳에는 넓게 묘지들이 흩어져 있어 묘지석물과 석물 변천사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 문화제다.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은 사적 440호다. 서울 노원구 월계동산 8-3, 및 동58번지 일대에 있다. 철조망 따라 초안산 한줄기 매봉산을 올라섰다. 넓은 바위지대에는 허공바위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소가 7개의 칼을 등에 맞고서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여 안골, 각심말, 벼루말 등에 사람들이 산제를 지낸 것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전한다. 예전에는 소 한 마리 통째로 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약식으로 제를 올리고 있다. 이전에는 제각이 있어서 그곳에 모든 제기를 보관하고 음식을 준비했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됐다.
이곳 허공바위에서 제를 올릴 때 흰 천으로 양 옆을 두르고 천신의 기를 받아야 하므로 하늘을 막지 않고 지냈다 한다. 1년 3회 지냈는데 지금은 10월에 한번 지낸다. 지금은 허공바위에서 살아있는 소로 제사 지낼 때 사용하던 7자루 식칼과 놋숟가락이 전해온다.

발품 팔아 조금 올라가면 매봉산 삼각점에 이르고, 곧 녹천정(鹿川亭)에 도착한다. 록천(鹿川)의 유래도 흥미롭다. 녹천마을은 월계동의 중심인 월계2동 683, 685번지 일대를 말한다. 조선 중기 때 큰 홍수로 인해 지금의 월계로 근방 마을은 모두 폐허가 되었다.

이 때 마을의 한 사람이 지난 밤 꿈에 신선이 중랑천 가에 푸른 사슴 한 마리가 내려와 목욕을 할 것이니, 제물로 바치고 처녀 한 사람을 사슴에게 시집보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라는 말을 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염씨 집의 15세 난 딸은 사슴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며칠 후 사슴 한 마리가 산에서 내려와 중랑천에서 목욕을 한 후 처녀를 태우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사라졌다.

그 후 이 마을 내천이 흐르면서 물이 빠졌다. 이에 한 사람이 이전 사슴과 결혼한 염씨 처녀의 눈물이니 냇물 이름을 녹천이라고 하자라고 해서 마을 이름 또한 녹천이 되었다. 이날 이후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녹천역 부근의 옛 이야기다.

녹천정에서 왼쪽길을 택하면 지하철 1호선 월계역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계속 직진하면 초안산 정상이다. 초안산은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남단 창동에 있는 산이다. 조선시대의 무덤 1천여 기(基)가 밀집해 있는 곳이다. 편안한 안식처를 정한다는 의미에서 초안산(楚安山)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자연환경을 살펴보면 초안산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산 192번지 일대에서 노원구 월계동에 걸쳐 있는 야산이다.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한북정맥에 북한산, 도봉산 등이 있는데 초안산은 한북정맥으로부터 벗어난 곳에 나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 구릉성 산지이다.

산은 모래와 진흙 등의 마사토 지질로 배수가 잘되고 산세도 험하지 않다. 초안산은 왼쪽은 우이천, 오른쪽은 중랑천이 산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어서 묘역을 조성하기 유리한 자연적 조건을 갖추었던 곳이다. 이로 인해 초안산에 신분을 초월한 공동묘지가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초안산은 2002년 3월 9일 사적 제1440호 ‘서울 초안산 분묘군’으로 지정되었다. 1999년 초안산에 골프 연습장을 짓는 것으로 사업허가가 났으나, 주민들이 반대하여 도봉구와 사업시행자 간에 오랜 법정 다툼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결국 13년 만인 2012년 4월 26일 주민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초안산 근린공원이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공원에는 등산로, 휴게시설, 배드민턴장과 각종 체육시설이 구비되어 있어 주민들의 자연학습과 여가선용의 장소가 되고 있다. 도봉구에서는 초안산 근린공원에 나눔 텃밭을 조성 운영하고 있다.

초안산 자락을 돌아 산을 넘으며 푸르름을 더하는 산림의 생태계를 살펴보면서 참나무의 발육과 성장이 경이로웠다. 식물학에 특히 관심이 깊은 외우 심태섭 교수는 이렇게 참나무가 많은 산은 처음이라며 즐거워했다. 야생화 까치수영이 무더기로 피어있는 모습도 경이로웠다. 녹천대감 이유(李濡?1645~1721)와 녹천마을 치성제 이야기를 하면서 끝을 맺을가 한다.

영의정 이유 대감은 세종대감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이여’의 후예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했던 문인이다. 우의정, 좌의정 그리고 영의정까지 지냈다. 북한산성 수축공사의 대역사를 마무리했다. 이 대감이 벼슬을 끝내고 말년을 경치 좋고,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어 찾아다니시다가 찾아낸 곳이 녹천마을이었다.

정년은급으로 하사받은 땅은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소작을 하게 했다. 주민들은 해마다 녹천대감 치성제를 지내고 있다. 녹천대감을 기리는 치성제는 마을 공공의 제사로 발전하였고 치성제 터로 월계 2동 4-2 마을 뒷산, 초안산 자락이 되었다. 1년에 세 번 제사를 지낸다. 음력 2월 초하루, 6월 초하루, 그리고 10월 초하루다. 치성제의 신주(神主)로는 녹천대감을 모시고 그의 생신날 음력 2월 16일에 면국수, 산적 등 제사 음식으로 간소하게 지내고 있다.

지하철 1호선 녹천역, 녹천마을 유래와 이유 대감에 대한 감사의 치성제가 영원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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