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얹어 사람이 지고 다니게 만든 기구, ‘지게’는 한국의 대표적 운반 기구 중 하나다. 지게는 두개의 가지 돋친 긴 나무를 위는 좁고 아래는 벌어지게 나란히 세우고 그 사이를 사개로 가로 질러 맞추고 아래 위를 질빵을 걸었다. 

‘양다리방아’와 ‘지게’는 한국에서 발명한 가장 우수한 연장이라고 말한다. ‘지게’는 처음엔 ‘지개’로 불렸다고 한다. 우리 문헌상 ‘지게’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고 있는 책은 조선 숙종 16년(1690)에 발간된 청나라말 교본 <역어유해(譯語類解)>에 지게-배협자(背狹子)로 표현하고 있다.

또 조선 영조 25년(1748) 만주말 자수서 <동문유해(同文類解)>는 지게를 우리말에 가깝게 처음 쓴 책이다. 1766년<중보산림경제>에는 부지기(負持機)로, 지기에 나타난 ‘지게’에 ‘진다’는 뜻(負)을 덧붙인 표현이 있어 ‘지게’라는 말은 18세기 말엽에 굳혀진 이름으로 전해온다.  

지게의 몸통으로는 소나무를 많이 썼고, 사용할 사람의 체구에 맞게 깎았다. 한 농가에 여러 개의 지게가 있었다. 전국 어디서나 두루 사용했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었고 그 형태, 크기, 모양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 썼다. 

지게의 몸통의 세장(細杖)은 밤나무나 박달나무 같은 단단한 목재를 사용하였다. 가지가 약간 위로 벌어난 자연목 2개, 위는 좁고 아래는 벌어지도록 세우고, 사이사이에 세장을 끼웠다. 그런 뒤에 탕개로 죄어서 사개를 맞추어 고정시켰다.

위, 아래로 멜방을 걸어, 어깨에 멘다. 등이 닿는 부분은 짚으로 짠 등태, 지게를 세우는 작대기를 세장에 걸어 곡물, 나무, 거름 등 사람 힘으로 나를 수 있는 대부분의 물건을 나를 때 썼다. 건장한 남자들은 보통 50~70㎏까지 지고 다니지만 보통 5~6㎏의 짐을 나르는데 썼다. 

경기도 반월에서는 세장이 6개짜리 지게도 있었고, 전라도에는 중앙부가 좁고 상하부가 밖으로 벌어지는 지게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한국의 대표적 운반기구 지게보다 우차(牛車) 또는 마차(馬車)는 한번에 많은 짐을 나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것들은 부유한 집의 전유물이요, 길의 폭이 좁은 산간 마을에서는 쓸 수도 없다. 그러나 지게는 가난한 농가라고 하더라도 누구나 한 채는 가지고 있는 중요한 운반도구다. 옛날엔 아이들이 질수 있는 작은 지게도 만들었다.

지게로는 다양한 물건을 운반했다. 농촌은 봄에 거름, 찐모. 가을에는 볏짚, 쌀가마. 겨울엔 땔감, 꽃, 나무를 날랐다. 평야지역 농촌에서는 쟁기를, 어촌에서는 해초나 물고기를, 산간지역에서는 돌을 실어 날랐다. 공사판의 일꾼들, 건축현장의 일꾼들도 유용한 작업도구였다. 지게는 물건뿐만 아니라 병자나 노인, 어린이 등 사람을 나르는데도 이용하였다. 

 우리는 가까운 중국으로부터 문물이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지게만큼은 우리의 발명품이다. 중국에서도 지게를 쓰지만 극히 제한된 지역에서 소수 민족만이 사용하며, 특히 중국에서 ‘지게(背架)’하면 먼저 조선족들이 진 지게가 떠오르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 민족의 물건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사안이다. 

우리의 지게는 일본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우리의 지게는 쓰이는 지역, 용도에 따라 형태가 다양하며, 지게 자체에 대한 명칭도 방언을 포함하면 이루 헤아릴 수없이 다양하다. 만드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주위환경에 따라 만들어지면서 발전 되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 기원을 살펴보려는 노력도 더 필요한 우리의 임무다. 

국립민속발문과 정연학박사는 16세기 초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들어 ‘지게’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가사로 표현했다. “이 몸이 주근 후(後)면 지게 우희 거적 더퍼 주리혀 매여 가나”란 대목이다. 죽은 사람을 거적으로 덮거나, 멍석에 말아서 지게에 실어다 땅에 묻는 풍습은 근래까지 이어졌다.

6.25 전란시절 필자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사상자들을 지게에 나르는 광경을 무수히 보았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선 6.25 전쟁 중 산꼭대기까지 식량과 탄환 그리고 보급물을 지게로 나르던 시절을 회상하게 된다. 신라 무덤에서 출토된 토우 중에는 지게를 진 인물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지게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믿게 만든다. 

 지게는 몸체와 가지를 근거로 하여 지역에 따라 그 종류도 다양한 우리의 지게는 크게 ‘제가지지게’, ‘쪽지게’, ‘바지게’로 나눌수 있다. ‘제가지지게’는 우리의 대표적 지게다. 다만 평야지역과 산간지역에 따라 크기가 다르다. 평야지역 지게는 몸체가 길다. 산간지역에서는 경사가 급하고 돌부리, 나무, 풀 따위가 많아 다리가 길면 걸려 넘어질 수 있어 다리가 짧다. 다리가 길면 지게를 지거나, 내릴 때, 중간에 쉬기 편하여 자연 제약이 적게 드는 평야지역용이다.

강원 산간지역에 쓰이는 ‘옥지게’는 ‘가지가 굽은 지게’라는 뜻인데 가지의 중간 부분을 위쪽으로 구부려 쓴다. 나무가 많고 비탈이 심한 곳에서 지게를 지고서는 제대로 걸을 수 없기 때문에 짐을 싣고 지게를 뉘어 놓은 채 사람이 목발을 두 손으로 잡고 끈다. 지게가지를 꾸부린 곳은 잘 미끄러지게 하기 위한 것이고 다리가 부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단단한 참나무 불에 구워 만든다. 

‘쪽지게’는 제가지지게를 만들 재료감을 구하기 어려울 때 사용자들이 고안하여 만들어 쓴다. 전라북도와 경기도 지방에서 쓰이고 있다. 인천광역시 광화군 교동도의 쪽지게는 다른 지게와 달리 지게다리에 두 개의 구멍을 뚫어 상황에 따라 가지를 옮기도록 만들었다.

무거운 집일 경우 윗구멍에 가지를 끼워 쓰고, 가벼운 짐은 아래구멍에 가지를 끼워 쓴다. 돌을 나르는 지게도 쪽지게인데 길이와 가지가 일반지게의 1/3정도다. 전남 영광군 법성포에서는 조기를 나를 때 쪽지게를 쓴다. ‘조기지게’라 한다. 충남 서해안 서천·비인·대전 등지에서 쓰는 ‘조락지게’가 쪽지게다. ‘조기지게’는 몸체는 짧지만 가지는 상대적으로 긴 편이다. 이 지게의 특성은 목발사이의 너비를 크게 벌리기 위해 지게 다리를 넓혀 쓰게 고안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바지게’는 강원도 고성·양양, 경북 울진 등지의 등짐장수들이 지던 지게다. 소금, 해초, 물고기를 나르는데 이용되었다. 강원 삼척·하장면에서도 짐을 나르는데 사용되었다. 이 지게는 알파벳 A자꼴로 만들고 A자 꼭지점 위로 작대기를 뿔처럼 세워 그것에 짐을 걸고 끈으로 엮는다. 전북 익산에서는 쟁기 나르는데 쓰였고, 공사장에서는 벽돌을 나르는데도 쓰였다. 

지게는 보기엔 단순해도 꽤 창의적 발명품이다. 나무꾼지게, 똥장군지게, 옹기장이지게, 거름지게, 북청물장수지게... 쓰임에 따라 무궁무진하다. 1932.3.1 잡지<삼천리>3월 호엔 함경도 물장수 서울에 700명, 아침부터 밤까지, ‘헤헤’ 소리치며 이골목저골목 누비는 장관을 써놓았다. 

1901년 지그프리드 켄테는 <한국견문록>에서 지게를 신통방통한 물건이라면서 “사람이 어깨근육을 이용해서 힘을 덜 들이고 수월하게 운반할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조선인의 탁월한 발명품이라 말하고 싶다.”고 썼다. 프랑스 민속학자 사를르바라도는 지게는 양어깨와 등의 힘을 조화시킨 창의적이고 과학적인 운반기구라 했다. 

지게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 농기구다. 6.25전 때 미국인들은 A-frame(A자 모양의 틀)이라고 불렀다. 지게를 지면 뒤뚱거리는 걸음모습을 보고 ‘지게걸음’이라고도 했다. 평안도에서 ‘끈기 있다’를 ‘지게가 있다’, 고집이 센 것을 ‘지게가 굳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참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끈기를 느낀다. 지게를 영어로는 a coolior rack, an A-frame, a carrying rack, 그리고 a back rack로 부른다.

지게는 망가지거나 낡아도 불에 태우지 않는다. 사람의 혼이 배어있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염병이 창궐하여 사람이 죽으면 지게로 옮겼으며, 그 자리에서 불에 태워버렸다. 나쁜 액운이 집으로 따라 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지게가지가 집안으로 향하도로고 놓지 않는다. 이것은 집안의 산송장을 치워야 한다는 고려장 풍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 불효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메드월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