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섬’ 강화도.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역사의 땅’, 눈물의 섬이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빚어놓은 한송이 아름다운 꽃이 강화(江華)라면 그 꽃의 중심부가 바로 강화읍이다. 고려시대 원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39년간 개성을 대신한 임시수도였으며, 그 도성이 있었던 곳이기에 강화를 강도(江都)라 부르는 것은 한때 일국의 수도요, 도성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강화도령’으로 불리는 조선 25대 임금 철종을 배출했으며, 왕위에 오르기 전 거처였던 용흥궁이 읍내에 있다. 강화읍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과 동서남북 네 개의 문, 고려궁지, 용흥궁 등을 볼 수 있는 읍내는 강화걷기 여행의 그 첫 번째 코스이며 수도원 답사코스 1번지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사를 올리던 선사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근대화시기까지 파란만장한 역사가 이곳에서 펼쳐졌다.

고려와 조선시대 전쟁이 나면 강화도는 늘 피난처가 되었다. 육지와 섬 사이의 염하(鹽河)라는 천혜의 자연방어선과 드넓은 농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화의 유구한 역사와 빼어난 자연을 구석구석 둘러보는 길이 ‘강화나들길’이다.

강화나들길은 역사의 상처를 다독이는 치유의 길이다. 그 제1코스는 ‘심도 역사문화길’이다. 심도(沁都)는 강화의 옛 이름을 말한다. ‘나들’은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드는 것처럼 대대로 사람들이 왕래했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아름다운 강화를 ‘나들이’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금까지 1~8코스, 7~1코스, 교동도 나들길 등 총 10개의 코스가 만들어졌다.

제1코스 ‘심도 역사문화길’은 강화산성과 연미정을 비롯한 문화유산과 골목길, 숲길, 마을고샅길, 들길과 물길 등을 두루 거친다. 강화나들길의 대표코스라면 단연 제1코스 ‘심도역사길’을 내세운다.

강화는 나의 고향이다. 광복 전후 6.25전쟁까지는 서울나들이는 선편에 의존했지만 이제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있어 교통이 정말 편리해졌다.

단군왕검의 마니산 참성단, 세 아들의 삼랑성은 강화 남쪽이다. 초지대교를 타면 더 빠르게 간다. 강화읍은 강화대교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서울 88고속화도로가 김포의 나래고속화도로와 연결되어 있고, 이제는 초지대교를 건너는 도로가 완성되었다. 서울에서 김포반도를 거쳐 강화대교를 건너면 1시간 반이면 강화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우리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 산과 들녘, 산골마을과 갯마을, 그리고 갯벌과 철새서식지를 잇는 강화나들길은 강화읍내 우체국사거리 북쪽 망한루(望漢樓)에서 시작한다. 망한루는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범에 대비해 1332년(고종19년) 고려 궁지를 가운데 두고 둘러싼 강화산성의 동문(東門)이다. 읍내 송악 기슭에 자리 잡은 고려궁지는 몽골의 침입으로 천도한 고려 고종과 원종이 39년 동안 숨죽인 채 지냈던 곳이다.

‘강화나들길’을 가리키는 작은 팻말과 전봇대에 매달린 꼬리표가 가리키는 대로 1970년대 분위기의 고삿길을 따르다 보면 넓은 주차장이 있는 용흥궁공원이다.

이 주변으로 용흥궁, 강화성당, 고려궁지 등의 내력 깊은 문화유적들이 몰려있다. 용흥궁은 강화도령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열 아홉 살 때까지 살던 집이다. 원래는 초가였으나 철종이 즉위한 뒤에 강화유수가 기와집으로 고쳐 짓고 ‘용이 승천한 궁’이라는 뜻으로 용흥궁이라 명명했다.

전통다도 예절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용흥궁은 연잎 떠 있는 수반, 반짝이는 장독, 뚜껑 덮인 우물 등 마당 구석구석 널려 있는 것마다 어린시절 고향집을 떠올리게 해 정겹게 보인다.

용흥공원 주차장 위쪽에는 거대한 회화나무가 서있는 성공회 강화성당이 있다. 한옥 성전에 보리수-회화나무 다정하게 서있는 뜻이 궁금하다. 유교의 선비를 상징하는 회화나무, 석가모니의 득도를 상징하는 수령 100년이 넘은 보리수의 그림자가 신비롭다. 한국성공회 제3대 주교 마크 트롤로프 신부가 영국에 다녀오던 중 인도에서 10년생 나무를 가져와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천주성전은 전체적 모습은 방주를 형상화했다. 추녀마루 위에 용두(龍頭)들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불교의 반야용선(般若龍船?용을 형상화한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주는 배)이 연상되는 건물이다. 정면 4칸, 전통건축이 홀수칸인 것에 비해 짝수 칸인 것이 조금 낯설다.

가운데 2칸은 본당, 가장자리 1칸씩은 복도로 구성돼 있다. 건물을 천정까지 하나로 뚫려있는 층층구조다. 내부의 성수대는 ‘중생지천(重生之泉?거듭나는 샘물)이란 글씨가 쓰여 있다.

성공회는 세계 각 지역의 문화와 분위기에 맞는 예배당을 만들어 외래 종교에 대한 현지의 거부감을 완화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890년 조선에 첫발을 디딘 한국주교 존 코스신부가 강화도에서 첫 조선인 세례신자가 나온 것을 기념해 1900년 이곳에 한옥성당을 지었다. 뗏목을 이용해 두만강과 서해를 통해 운반해 온 백두산 소나무를 목재로 썼다고 하니 실로 대단한 노력이 아닐 수 없다. 성당은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목수와 솜씨 좋은 중국 석공까지 데려와 지었다. 사적 제424호다. 전체적으로 배 모양을 띠는 이 건물은 조선의 전통한옥에 서양의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절충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영락없는 절간이지만, 내부에는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의 예배공간을 갖췄다. 초창기 선교사들의 세심한 배려와 토착화노력이 엿보이는 걸작이다.

고려궁지로 올라서면 강화읍과 주변 산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려궁지는 1270(원종11년)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 사용되다가 몽골과 맺은 강화조약 조건에 따라 허물어졌다. 그 후 조선 인조 9년(1631) 행궁과 외규장각 등을 지어 국가의 장서와 문서를 보관해오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많은 책과 서류를 약탈해가고 건물을 불살라 버린 비운의 현장이 되었다. 강화도 고려궁터 외규장각, 전각 옆 회화나무는 그날의 약탈 참상을 알고 있겠지.

고려궁지는 고려왕조의 왕궁이 있었던 곳인 만큼 지금보다 터가 더 넓었다. 궁궐은 송도의 궁과 비슷하게 만들어졌고, 그 뒷산도 송악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1711년에 만들어진 강화동종(보물11호)은 강화 역사박물관 1층에 전시되어 있고, 고려궁지엔 복제품이 궁궐터를 지키고 있다.

“이곳은 산도 푸르고 옷 색깔이 너무 다양해서 마치 커다란 꽃바구니를 보는 것같다. 게다가 그들이 강화 왕립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책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지만 예술품에 가깝지 아니한가?” 한 프랑스 군인의 회고록에서.

강화도 해안에 상륙한 프랑스 군인들은 무기고를 점령하고 외규장각 서고에 소장된 조선 고문서를 약탈했다. 멀고 먼 나라에 건너간 외규장각 의궤들은 1975년에야 재불학자 박병서 박사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졌다. 계속된 우리나라의 반환요구로 병인양요(1866) 이후 145년 만에 1911년 5월 드디어 297권 모든 의궤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고려궁지를 벗어나 숲길 따라 북문(北門)으로 향한다. 길 아래쪽으론 향교건물, 북문으로 이어지는 울창한 숲능선도 눈에 들어온다. 제1구간 길이다.

진송루(鎭松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북문으로 들어선다. 북문에서 오읍(五泣)약수터까지 이르는 숲길은 강화에서 손꼽힐 만큼 뛰어난 숲길이다. 오읍약수는 양봉원 옆에 자리 잡고 있다. 가뭄에 시달리던 주민들과 몽골군을 피해 피난 온 이들이 이 물을 마시고 향수를 달랬다고 하는 유명한 우물이다. 송학골 빨래터로 내려서면서 아스팔트 도로를 따르다 운동장 뒤편 숲길로 들어선다.

역사문화길은 숲길로 이어지다 산골마을로 내려서고, 도로 아래 터널을 빠져나간 뒤 콘크리트길 따라 100여m 정도 가면 또다시 왼쪽 산등성이로 올라붙는다. 다시 울창한 숲길이 30여분 이어지다 다시 월곶지 마을로 내려선다. 마을 끝에 이르면 월곶돈대가 기다린다. 돈대 위에 연미정(燕尾亭)이 제비처럼 앉아있다.

연미정 정자 아래로 한강과 임진강물이 합쳐졌다가 한줄기가 서해로 흘러들고 또 한줄기가 김포와 강화를 가르는 해협, 염하로 흘러드는 모습이 마치 제비꼬리와 같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비운의 역사현장이기도 하지만, 그 옛날 서해에서 한양으로 가려는 배들이 정자 아래에서 만조(滿朝)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하니 뱃사람들에게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500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멋들어지게 그늘을 드리운 연미정에 올라서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강 건너로는 북한 개풍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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