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5호선 우장산역 1번 출구를 나서면 지하철 출구번호는 516이다. 지금은 김포공항을 가자면 지하철로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오늘의 우장산동, 화곡동은 농촌지역을 벗어나지 못했었다.

우장산길은 강서로에서 우장산공원을 거쳐 화곡로에 이르는 1,240m, 12m 2차선 도로가 뚫리고 우장산은 빌딩 숲 속에 묻혀 있다. 우장산 도서관, 우장산공원, 신트리공원 그리고 배다리공원이 늘어서 있다. 대동여지도의 증산에 해당되는 우장산은 매봉산의 서북쪽에 있어 화곡동의 진산(鎭山)이다.

원당산(元堂山)은 영등포구 당산동 4,5,6가 일대 옛날 당집이 있던 마을이고, 40여호 인가가 있었다 한다. 당산동 6가, 1925년 을축년 장마 때 사람들이 물난리를 피한 산이요, 인명을 구해준 산 상엔 당산사(唐山詞)가 서있어서 1년에 2번 동제(洞祭)를 지낸다고 한다.

이제 우장산(雨裝山?99m)은 서울특별시 강서구에 속하며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던 산이다. 기우제를 마치는 날에는 반드시 비가 내려서 모두 우장을 준비하였다는데서 유래된 산이름이다.

검지산(劍支山) 원당산(元堂山)으로도 불렸던 화곡동의 진산이다. 총면적 356,000㎡, 해발 98.9m. 강서구민회관, 시립청소년 직업훈련원, 정수기능대학이 있어 지하철 1번 출구의 지하철 주소 516번은 의미있어 보였다. 산중에 포리텍대학 건물과 축구장은 돋보였다. 우장산역에서 내려 10분 쯤 걸어가면 우장산 입구다.

우장산은 북쪽과 남쪽봉이 있다. 북쪽봉은 검두산(鈐頭山), 검지산(劍支山), 검둥뫼, 검덕산(鈐德山)으로 불리고, 남쪽산은 원당산(元堂山), 남산으로 부르고 있다.

검두산, 검덕산의 ‘검(鈐)’자는 보습 검(鈐)자다. 보습은 농사철 땅을 가는 쟁기의 날이다. 보습은 쟁기나 곡젱이의 술바닥에 맞추는 삽 모양의 쇳조각이다. 땅을 갈아서 고랑을 파고 흙덩이를 일으키는 일을 하는 농기구다. 산모양이 농사기구처럼 생겼다는 이름을 얻어 보습산이 되었고 기우제 산이었다.

농경사회에서 가뭄이 들면 다 죽는다. 전쟁보다 무서운 재앙은 비가 오지 않는 가뭄이다. 전쟁에서는 적어도 승리자는 살지만 가뭄이 들면 다 죽는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기우제(祈雨祭)는 왕이 주관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홍수는 가뭄 다음가는 재난이다. 홍수로 인해 물줄기가 수시로 바뀌는 것도 큰 문제였다. 농경사회에서는 물과 비는 생존과 직결되는 재난 중 큰 재난이었다.

통치(統治), 정치(政治), 치국(治國)에는 다스릴 ‘치(治)’자가 들어간다. 치(治)자를 탈자하면 삼수(?)변에 별태(台)자가 된다. 따라서 치(治)라는 글자는 높은 장소(台)에 올라가서 물(?)을 바라보는 의미로 해석한 것은 뜻이 깊다고 믿어진다.

왕이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강물의 흐름을 살펴보며 물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다스리는 것이여서 고대사회에서 물을 중요시 했다.

동아시아 고대 농경사회에서 용은 비와 물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으로 숭배되었다. 고대 서양은 농경사회가 아니었으므로 용이 퇴치의 대상이었지만 동양은 농경사회였으므로 용은 숭배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용은 제왕의 상징이다.

20세기 한자(漢子)의 연구, 특히 갑골문(甲骨文)의 연구는 글자의 해석이 흥미롭고 과학적 지식이 배어 있어 경이롭다. 원래 유가(儒家)는 시체를 처리하는 장례(葬禮)와 비가 오지 않을 때 지내는 기우제(祈雨祭)를 담당하는 집단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유(儒)’자에서 사람인(人)을 떼어놓고 보면 윗 글자가 비‘우(雨)’다. 그 아래에는 ‘이(而)’가 있다. ‘이(而)’자는 머리카락을 묶지 않고 풀어헤친 모습을 상징한다. 가뭄이 들어 비가 오도록 제사를 지낼 때는 머리를 풀어헤쳤다. 따라서 ‘유(儒)’의 본래 의미는 ‘비를 기워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비가 계속해서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낸 유(儒), 즉 무당이 대신 책임을 지고 죽어야만 했다. 어떤 경우에는 왕이 가뭄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지고 장작불 더미에 올라가 불에 타죽어야만 했다. 유(儒)는 이처럼 비가 오지 않으면 처형당하는 처지에 있었으므로 장례식도 아울러 주관하게 되었다는 것이 <주술의 사상>을 지은 시라가와 시즈카의 지론이다.

농본국가에서 벼농사에는 적절한 강우량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장마철에만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고 그 전후에는 가뭄이 계속되는 때가 자주 있었다. 천수답에 의존하여 농사 지을 때는 기우제는 전국적으로 보편적 행사였다. 농민의 생사를 좌우하는 것이 농사이고, 그 농사를 좌우하는 것이 비였기 때문에 기우제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단군신화 속 환웅이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이땅에 내려온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삼국이 각각 시조묘 명산대천에서 기우제를 올렸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다. 왕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 오늘날까지도 행해졌던 시장을 옮기고, 농사와 비의 신(神)용을 그려 비가 내리도록 빌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기우제에는 국왕과 신하들이 근신하고 천지, 산천, 종묘, 부처, 용신에게까지도 제를 올렸고, 비를 기다리며 법회를 열었다. 무당을 모아 비 내리도록 비는 취무도우(聚巫禱雨)의 기록이 있어 300여 명이 모여 길게는 6일씩, 흙으로 용을 만들어 비가 내리기를 빌고 빌었다.

<고려사절요>에는 기우제 행사예법이 기록되어 있어, 가뭄 때는 죄수들을 자세히 재심하여 억울한 죄인이 없도록 했으며, 가난을 구제하고 무덤이 파헤쳐져 밖으로 드러난 해골을 묻어주었다.

큰산, 강, 바다는 구름과 비를 일으키는 곳이라 하여 북쪽 교외에서 기도하고, 종묘에서 빌었다. 이같은 의식을 7일마다 한번씩 빌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다시 큰 산, 강, 바다에 처음과 같이 기도하고, 가뭄이 심해지면 기우초제를 지내는 제단인기우단에 제사를 지냈다.

국왕은 정전을 피하여 밖에서 정무를 보았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며,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지변은 국왕이나 조정 대신들이 덕이 없어 정치를 잘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조선시대에도 기우제는 잦았다. <조선왕조실록>엔 기우제가 음력 4월에서 7월 사이의 연중행사였다. 나라에서 지내는 기우제는 국행기우제라 하여 12제차가 있어서 명산, 대천, 종묘, 사직, 북교의 용신들에게 지내는 절차가 있었다.

민간, 지방관청 기우제도 다양하였다. 1930년대 이후 기우제 유형과 방법들은 변화를 거듭하여 동제(洞祭)지낼 때와 같은 방식으로 제관들이 선출되고 제물을 차렸다. 제사절차도 크게 변함없이 진행되었다.
마을사람, 제관들이 산상분화(山上焚火)를 하였다. 군(郡)에서 주관하며 야간에 이루어져 장관을 이루었다. 물병 거꾸로 매달기, 부인들이 물동이에 강물을 길어 산 위의 기우제장에 가서 절하고 쏟아버리기, 시장 옮기기와 삼국시대부터 전국각지에서 성행하는 용제(龍祭)가 거행되었다. 정월대보름 줄다리기도 거행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계속 행해지는 부정화(不淨化)는 기우제장이나 용신이 있다고 믿어지는 용소(龍沼), 용연(龍淵) 등에 개를 잡아서 생피를 뿌리거나 머리 던져 신성성을 더럽히고, 이를 씻어내기 위해 큰 용신이 비를 내린다.

명산의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자손이 번창한다는 것으로 알고 산을 뒤져서 묘를 파내고 시체가 있으면 이것을 드러내 놓는다. 이것은 산신에게 비를 내리고 부정을 씻게 하려는 부정한 방법이다. 1970년대에 작성된 <한국민속종합 조사보고서>에선 기우제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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