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역사적인 도시이다. 2000여 년 전 백제 온조대왕 이후 근 500년간 백제의 수도였으며, 한강을 장악하기 위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쟁패가 벌어진 현장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남한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신석기시대의 집터(자리)가 발굴된 곳이기도 하다. 서울의 역사성은 이처럼 깊다. 서울이 워낙 넓은 곳이므로, 하루 동안 모든 문화유적을 살피기에는 역부족이다.

서울시 강동구와 송파구에는 하루짜리 ‘서울 문화유산 답사’코스로 짜인 역사탐방코스가 있다. 이곳은 고대사(古代史)의 보고라 할 만하다. 서울은 백제까지의 고대(古代)에는 이 지역 송파구와 강동구 지역이 서울의 중심지였다. 강동구 지역에는 암사동 선사유적이 있다. 송파구 지역에는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 방이동 백제고분군 등이 있다.

북쪽 한강변에 위치한 광나루는 한강에 위치한 나루들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조선조 경부대로의 길목에 위치해 있으니 임진왜란 이후 서울과 부산을 잇는 파발(把撥)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광나루는 광진교 건설 이후 나루터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그 지명만 남았다.

천호대교가 인근에 생기면서 광진교는 서울 시민들의 통로역할과 쉼터 그리고 전망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최근 경기도 구리시와 강동구 암사동을 잇는 암사대교가 건설되었으니, 광진교를 걸으면서 느끼는 감회는 서울의 변화다. 2015년 12월도 마지막 일요일을 맞아 강을 건너며 겨울을 즐긴다. 한강 서쪽을 바라보면 올림픽대교를 비롯 철교들이 나란히 줄을 선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자웅을 겨루었다. 광나루 위로는 아차산이 병풍처럼 지키고 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광진(廣津)을 보면 아차산 아래 오늘날 워커힐이 자리 잡은 광나루 북쪽 언덕에는 나룻터를 관리하는 도승(渡丞)이 있어 사람들의 숙박을 도왔다. 한눈에 한강의 흐름이 다 보이고 백제시대 토성도 시야에 들어온다. 군사전략상 중요위치에 있던 광진나루는 삼국시대 이 땅을 차지하는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다.

백제는 고구려가 한강을 빼앗기 전까지 500년 동안 이곳에 터를 잡았고 475년 수도 한성이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함락되었고 백제 개로왕이 전사했다. 551년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되찾았지만 진흥왕의 배반으로 도로 빼앗겼다. 590년 고구려 온달 장군은 신라에 빼앗긴 땅을 찾으려고 전투를 지원하러 나갔다가 전사했다.

한강을 차지한 국가가 한반도의 패권국이 되었고 광나루는 항시 군사 요충지가 되었다. 옛날엔 아차산 주변과 광나루 근처는 말 기르는 목장이었다. 겸재 정선의 그림 아차산엔 푸른 초원으로 묘사되었다.

삼봉 정도전의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엔 국운이 융성하는 기운으로 만마(萬馬)가 구름처럼 모여 뛰노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한강 중류의 교통상 중요 요지 광나루의 다른 이름은 양진(楊津), 광장(廣壯), 광진(廣津), 광진도(廣津渡)로도 불렸던 진취락(津聚落)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좌도수첨전운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이 도승(渡丞)을 겸직하였다. 격이 높던 자리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에 편입되어 성동구에서 광진구로 개편되었다. 그 옛날에는 강원도 경상도 물산이 이동하는 주요 통로로 세금을 받아들였고 사람의 왕래도 빈번하여 주막이 즐비하였는데 버드나무가 번성하여 양진(楊津)이란 이명을 얻게 되었다. 조선의 대표적 문인 서거정(徐居正)은 광진촌 풍광을 예찬하는 글을 남겼다.

 천지간의 좋은 풍경 강호상에 들어오는데
 천리나 넓은 안계(眼界)가 수묵화를 펼쳐 놓았구나
 갈매기 날아가는데 수면이 밝았다 어두웠다 푸른하늘
 저 끝엔 산이 보이다 말다 하네
 오래된 관청의 소나무 국화는 옛날 선비 서성대던 길이요
 몽리의 뽕나무 삼밭은 오랜 옛날의 한마을이라네
 한걸음 두걸음 보고 또 보느라니 벌써 해 서산에
 지려는데 비 지난 뒤 꽃기운이 젖처럼 윤기 흐르느나   (광진촌서. 晩兆 廣津村曙)

광진교를 건너면 한강변을 따라 암사동 선서유적지까지 강변길을 걷는 코스다. 한강공원 중에서도 자전거 도로가 가장 잘 조성되어 있어 자전거 공원이라고도 부른다. 이 자전거 공원과 4대강 자전거 종주길이 거쳐 가는 지점으로 자전거 타기도 좋은 곳이다.

암사동이란 지명은 ‘큰 바위가 있는 곳에 절을 세웠다’는 뜻이다. 특히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을 때는 9개의 사찰이 있었던 거대도시였다. 암사동 산1-1번지의 바위절터라고 불리는 동네에 ‘구암사’라고 불리는 곳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할 듯싶다. 이곳에 있는 구암사 원터는 조선 헌종 때 건립돼 숙종 때에는 현판을 왕으로부터 받아(사액?賜額) 인재를 배출해왔다.

한강변을 지나 올림픽대로를 교차하는 지점에서 암사동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암사선사 유적지 방향이다. 한강 유역을 따라 한반도 역사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은 신석기 시대에는 대규모 취락지였고 백제시대에는 위례성에 인접했던 요충지였다. 암사동은 남한 최초 발굴된 신석기시대 집터다.

사적267호 암사동 선사(先史)주거지는 19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까지 발굴이 계속되면서 남한 최초로 신석기시대 움집(땅을 70cm~1m정도 파고 지은 집)터가 대규모로 출토되어 고고학계를 흥분시켰다. 암사동 신석기시대 집터는 대체로 7000~3000년쯤으로 볼 수 있다.

석기시대 암사동 선사주거지의 발굴경위를 더 살펴보자. 1925년 여름 ‘을축년 대홍수’가 일어났다. 한강은 범람했고 강변 마을들은 물살에 휩쓸려 내려갔다. 사라진 토층 아래에서 팔천년 여 동안 땅속에서 잠자고 있던 선사시대가 발견된 것도 그때였다. 풍납토성도 그때 발견되었다. 북한산성의 성축도 대부분 소실됐다.

암사동 일대에서 신석기 유물 발굴조사가 본격 시작된 것은 대홍수 42년 후인 1967년이었다. 1971부터 1975년까지 5년 동안 발굴사업을 하고 8년 동안 학술적 근거를 확보한 후 암사동 선사주거지를 개관하게 되었다. 선사 거주지는 옥외 전시장과 실내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당에는 전시형 움집 여러 채와 체험용 움집이 있다. 야외에는 움집 외에 산책로도 조성되어 있다. 실내전시장은 두 곳이다. 제1전시장에는 발굴 당시의 움집터를 강화처리해서 보존 전시하고 있는 현장을 볼 수 있다.

전시장에는 신석기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과 대형 설명문들이 전시되어 있다. 생선의 가시, 동물의 뼈로 디자인한 빗살무늬토기도 전시되어 있는데 신석기시대인들의 상상력을 엿보게 하는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제2전시장에는 각 지역의 신석기 문화와 초기 청동기 문학에 대한 유물과 설명이 전시되어 있다.

암사동 선사주거지는 1967년 한국대한박물관 협회가 본격 발굴 작업을 벌이면서 국립중앙박물관, 서울대 박물관등에서 답사했다.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6000년 전부터 20여 세대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발굴결과 움집터, 선사시대 사람이 먹었을 것으로 보이는 도토리, 저장창고 등 빗살무늬 밥그릇, 작은 항아리 등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세 가지 문화층이 발견되었다. 유적지 맨 아래 층에서는 빗살무늬 토기를 발굴했는데 석기시대 문화층임을 알려주는 증거다.

그 위에서는 무문계 빗살무늬토기, 맨 윗층에서는 합구식 옹관묘와 건축물의 적심석 등을 발견했는데, 백제의 유물에 해당된다. 암사동 선사거주지에는 모두 아홉 채의 움집이 복원되어 있다. 들어가 볼 수는 없다. 이들 6000년 전 움집이 1960년, 1970년대까지 존재했다.

선사(先史)주거지 백제풍납토성엔 무슨 사연이 있을까. 하루코스 ‘서울 고대사 탐방’은 신비를 간직한 서울 고도(古都)의 비밀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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