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불꽃은 물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유엔은 2003년을 『세계 물의 해』로 선포하였다. 7월 25일은 물 사랑, 감사의 날이다. 에모로 마사루 박사는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저서를 내놓았고, 물의 날 제정을 발의하였다.

문명발달과 함께 환경파괴가 뒤따르게 되었고 이제는 환경이 기업경영의 자원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지구상의 인구는 60억이다. 벌써 인간은 54%의 물을 점용해 버렸으니 다시 25년이 지나면 인간은 대부분의 물을 독점하게 될 전망이고 보면 다른 생물들의 삶은 어찌될 것인지 위험스럽고, 불안한 현실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일찍이 세계 삼대 문명발상지도 물을 따라 강에서 유래했다.

큰 강의 근원은 작은 샘이다. 한강의 발원지는 검용소(儉龍沼)다. 옹달샘이다. 태백시 금대봉 북서쪽 계곡에 있다. 하루 2000톤 물이 샘솟는다. 섬진강의 발원지는 호남정맥의 팔공산과 오계치 중간쯤 산중턱에 있는 상추막이꼴에 있는 데미샘이다.

우리는 샘을 파서 음료수로 마셨다. 상수도의 보급이 되지 못했던 시절 옛날 집집마다 우물이 있었다. 우물가는 동네 아낙네들이 하루의 일을 시작하던 생활터전이었다. 아침부터 물동이에 물을 채워 부엌에 저장했다. 지난밤 일어났던 일들이 안부와 함께 동네로 퍼져나간다.

우물은 마을의 큰일, 작은일, 공동체문화가 열리던 마당이었다. 빨래터, 무, 배추 다듬으며 동네 소식이 퍼져나가는 뉴스의 시발점이 되었다. 우물가 공론(公論)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지만, 소문은 발 없이 멀리 퍼진다. 시어머니는 다듬질 방망소리와 빨래터 방망이 소리를 들어 며느리의 불만을 알아 차렸다고도 했다.

역사상 씨족국가가 부족국가로 발전하면서 고조선의 단군신화, 부여 해부루설화, 고구려 주몽설화, 신라 박혁거세의 탄생설화들도 모두 우물을 배경으로 탄생하였다. 예부터 우물과 우물가는 우물신을 모셨고 물 잘나오고, 물맛을 빌었던 우물고사가 세시풍속에 전해오고 있다.

우물은 조상의 생활공간 구성에 무공간의 의미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우물은 소중한 곳, 법도가 있었고, 법도를 지키며 자연풍습과 자연의 순리에 맞게 조화해 나갔던 신성한 곳이었다. 식수를 얻은 우물은 길일을 택하여 땅을 파고 정성 드려 치장을 하였다.

옛날 시골 우물은 대부분 바가지 우물이었다. 물동이를 얹어 놓을 받침대가 있었고, 주위에는 나무들이 있었다. 깊은 우물은 잔돌을 포개어 정성스럽게 쌓았거나, 콘크리트도관을 넣어 치장하였고, 두꺼운 나무로 우물 정(井)자를 만들어 뚜껑을 얹어 물을 보호했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을 변경하며 가공하는 행위는 천심(天心)을 어기는 행위로 생각했다. 자연에 동화되어 자연의 일부가 되어 그 속에서 겸허하게 살아왔다.
폭포는 인공가미 없는 자연미의 극치라 할 수 있고 서양인들의 분수는 인공미의 극치여서 물의 흐름을 막아 물가닥 조형물이 아닌가? 슈벨트의 가곡 보리수 속의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여기 우물은 자연샘이 아니요, 분수다.

두레박질, 펌프우물은 이제 볼 수 없다. 나의 고향에는 찬우물, 냉천(冷泉) 동네가 있다. 조선왕조 철종이 귀양살이 하던 곳, 갈대밭 등짐 지며 살던 곳, 봉이와의 사랑이야기를 엮어낸 우물이 지금도 남아 있어 이제는 약수터가 되었다. 또 온수리(溫水里)에서는 지금도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이 지명 따라 온천을 찾아 열을 올리고 있으니 옛날 지명은 헛되게 만들어 진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 세월이 좋아져 상수도 공급, 관개시설 확충으로 농업용수의 공급이 확대되어 옛날 우물가 풍경은 모두 사라져 옛날 우물가 정겨웠던 일은 추억으로 간직하게 돼버렸다.

삼복더위 차가운 우물물로 목물하면서 흐느끼던 전율, 수박·참외를 자연냉장고에 넣었다가 건져내어 더위를 식히던 일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제 냉장고가 널리 보급되어 얼음이 사치품이 아니지만, 30년 전 한강 물은 음료수로 적절하여 수질도 양호했다. 1980년대 이후 지구온난화현상 때문에 한강 물이 얼지 않는다.

수돗물에 대한 불신도 크다. 그에 못지않게 지하수 오염문제도 도마에 올라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물가에는 옛날 사랑이야기는 흥미를 더 보내준다. 전쟁터에서 황급히 달려오던 장수가 우물가에서 냉수를 청했다. 분홍색 댕기를 길게 늘인 처녀가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한줌 따서 쪽박 물을 건내 주던 그 정다운 마음쓰임에 누군들 감동하지 않겠는가? 냉수 먹고도 채한다 했거늘....

산업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던 시절『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 듣던 서울로 도망갔네.』우물가의 정답던 정서가 무너져 내리는 노래처럼 들린다.

예부터 시골에서는 신랑이나 신부를 혼인한 뒤에 일갓집에 초대하였었는데 우물가에서는 우연히 뜻밖의 음식도 생겨 잘 먹게 되었기에 『우물길에서 반살미 받는다』했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증후군은 『우물 들고 마시겠다.』『우물가에서 숭늉 찾겠다.』했고, 직장에서 융통성 없으며 기지가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우물 옆에서 목말라 죽겠다』는 핀잔을 주기도 한다.

일이 익숙치 못한 사람에게 일을 시켜놓고 노심초사 하면서 『우물가에 애 보낸 것 같다.』『우물 둔 덕에 아이 내놓은 것 같다』는 말을 쓴다. 어려운 일은 살살 피하면서 타인에게 떠맡기는 사람을 일러 『우물귀신 잡아넣듯 한다.』라는 격언이 타당할 듯 하다.

세상은 변한다. 발전한다. 한 가지 일에 전문가가 되어 성공가도를 걸어야 하니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고 충고를 해야 되고, 세상 변하는 상황을 배우고 또 배워 『우물 안 개구리』는 닮지 말아야 하고 세계화, 국제화 감각을 키워나가야 한다.

‘인가가 많은 거리’를 ‘시정(市井)’이라 한다. ‘우물 정(井)’자가 들어있다. 물이 귀하던 시절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은 우물은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요 소통의 공간이었다. 옛 도성의 중심이었던 서울 종로구에서 조금 벗어난 작은 골목에는 복정(福井) 우물이 있다. 물이 맑고 맛이 좋아 궁에서만 사용하던 우물이다. 평상시에는 뚜껑을 닫아 자물쇠를 채워두고 보초까지 세워 일반인의 사용을 금했다.

1년에 한번 정월대보름에는 일반인도 물을 길을 수 있었는데 이 물로 밥을 지어먹으면 일년 내내 행운이 따른다고 했다. ‘복정우물은 복을 준다는 의미를 되살리자’는 주민의 건의를 받아들여 옛모습을 찾게 했다.

서울 북촌(北村) 한옥마을 가회동 석정보름우물(계동길110)은 물맛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이 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궁녀들도 몰래 떠다 마시며 아이 낳기를 기원했다 한다. 슬픈 이야기도 전해진다.

조선 정조8년(1784) 우물물이 넘쳐 내막을 조사해보니 천민인 망나니의 딸이 병조판서의 서자에게 반해 상사병을 앓다 결국 그를 죽여 우물에 유기하고 자신도 뒤따라 투신했다. 영혼을 달래는 제사를 드리자 범람은 멈추었으나 이후 물이 보름은 맑고 보름은 흐려져 ‘보름우물’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우물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도 중요한 곳이다.

1794년 압록강을 건너온 최초의 외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고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도 이 물을 성수(聖水)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천주교 박해 당시 많은 순교자가 나오자 갑자기 물맛이 써져서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석정 보름우물은 1987년에 한차례 복원되었으나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돌로 채워진 우물을 다시 복원하고 안내판과 안전을 위한 투명덮개를 함께 설치했다.

삼청로 9길 62에는 도교의 제사를 지내던 소격서(昭格署)에서 사용하던 성제정이 있다. 북두칠성에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하였기에 성제정(星祭井)으로도 불렀다. 물이 돌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그 물맛이 좋아 위장병에 특효있다고 하였다. 조선 정조 때는 수라상에 진상하기도 했다.

종로구 동숭동의 옛 이름은 백동(柏洞)이었고 잣나무숲이 무성했던 동네다. 동숭 나길15일대에는 백동우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종로구는 표시석을 세워 주변을 정비할 계획도 세웠다. 장차 우물과 문화재의 이야기를 발굴하여 주변 환경도 정비하여 관광과 연계하여 역사를 복원할 계획이라 전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메드월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