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구 공릉동 일대를 일컫는 ‘태릉’이라는 지명은 당연히 능이 있었기에 지어진 지명인데도 능보다는 근처에 있는 시설물들이 더 유명하다. 태릉선수촌, 태릉푸른동산, 태릉국제사격장, 육군사관학교까지 능역을 침범한 시설물들이 능보다 더 건재하기 때문이다.

태릉 주변이 기가 센 터인 까닭인지 지금도 그 근처에서 총소리, 기합소리, 구호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능호도 ‘클태(泰)’자를 쓴 것을 보면 태릉의 주인인 문정왕후가 남자 못지않게 기가 세고 활달했음을 알 수 있다.

태릉에 들어가 보면 홍살문으로 시작되는 본격적인 능역의 바깥공간은 어수선하고 숲도 많이 훼손되어 능이라기보다는 놀이공원 같은 느낌이 더 많이 든다. 그동안 태릉이 참배 장소보다 소풍지로 더 많이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태릉은 조선 제11대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윤씨의 단릉(單陵)이다. 문정왕후는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이다.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가 1515년(중종10)에 인종을 낳고 산후열로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17세 때 왕비로 책봉되었다.

중종과 혼인한지 17년 만에 문정왕후는 훗날 명종(조선13대 임금)이 되는 경원대군을 낳았다. 당시 제1계비 장경왕후가 낳은 아들이 세자(훗날의 인종)로 있었는데 문정왕후가 세자를 제거하고 경원대군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온갖 술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세자의 외삼촌 윤임을 주축으로 하는 편과 문정왕후와 그 동생 윤원형을 중심으로 하는 경원대군의 편으로 조정이 두 편으로 갈라졌다. 양쪽 다 윤씨 집안이기에 사람들은 윤임 측을 대윤, 윤원형 측을 소윤이라 불렀다.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세자를 제거하려던 문정왕후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30세의 인종이 즉위했다. 일단은 대윤의 승리인 듯 보였으나, 문정왕후는 인종에게 신세한탄...

 “나야말로 이제는 외로운 자식(경원대군)하나 보전치 못하겠구나. 대윤의 득세가 당당하니 앞길이 캄캄하도다. 나는 아예 절에 들어가 선왕의 명복이나 빌어야겠다.”

인종은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였다. 이런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왕의 지위에 있으면서 대비전 앞에 거적을 깔고 엎드려 며칠씩이나 빌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되풀이 되면서도 문정왕후의 포악은 수그러들 줄 몰랐다. 문정왕후가 간절히 바란 탓? 아니면 그녀의 적극적 행동 탓?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승하했다.

겨우 12세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고 막강한 권력행사를 했다. 그 첫째가 대윤세력의 제거였다. 윤원형의 소윤일파는 대윤의 윤임이 봉성군(중종의8남)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무고했다.

이에 끝이지 않고, 인종의 임종시 계림군(성종의 3남)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만들어 대궐밖에 퍼뜨렸다. 그 결과 윤임일파들은 반역죄로 유배가거나 사사됐다. 이 사건은 조선의 4대사화중 하나였던 을사사화였다.

윤원형 일파는 나머지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양재역 벽서사건’이란 옥사를 일으켰다. 경기도 광주 양재역에 ‘위로는 여왕이 집정하고 아래로는 간신이 권세를 휘둘러 나라가 망하려 하는데 보고만 있을 것인가?’ 익명의 벽보를 계기로 당시 학계와 정계에 또 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다.

1553년 문정왕후는 8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끝으로 명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명종의 뒤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명종을 억압했다. 문정왕후가 정치에 관여한 20여 년간 피바람 옥사와 함께 국고탕진, 백성은 기아선상에서 고통을 겪었다.

조선의 3대 도적 중 하나였던 임꺽정은 하나의 도적에 불과했으나 세상엔 의로운 사람으로 알려지기까지 했던 세대상황에 도적을 잡으려는 관군을 오히려 나쁜 무리로 몰았던 그 시대의 상황은 민심의 조정이반을 말해주고 있었다.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을 지켜온 조선에 불교중흥의 바람을 일으켰다. 폐지되었던 승과(僧科)와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를 뽑고 전국 300여개의 절을 공인했다. 승려 보우를 맞아들여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고 그가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하여 유생과 대신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절대 권력자의 권세를 누리던 문정왕후는 1565년 65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지원으로 득세하던 세력들도 몰락했다. 불교중흥이란 유언을 남겼지만 명종은 이를 무시하였고 보우를 처벌했다.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과 그의 소실 정난정은 단죄되어 유배지에서 자살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제11대 임금 중종의 정릉(靖陵)이야기를 곁들이면서 문정왕후의 중종이 遷葬前 서삼릉 정릉(靖陵)이야기를 해야겠다. 문정왕후는 남편 정종이 묻혀 있는 곳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의 선정릉(宣靖陵)으로 천장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옆에 묻힐 계획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새로 옮긴 자리는 지대가 낮아 자주 물에 잠기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 장사 지내던 해에도 선정릉에 물이 들어 결국 그녀는 남편 곁으로 가지 못하고 태릉에 묻히게 되었다.

그때 중종의 정릉을 태릉으로 옮기자는 의견도 제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두 번의 천장을 있을 수 없다는 의견에 밀려, 결국 부부가 각기 따로 능을 이루게 되었다. “태릉의 능침은 웅장한 느낌을 주고, 문무석인(文武石人)의 키도 조선 왕릉의 문무석인 중에서 가장 크다.” 능침을 돌아본 사람들의 말이다.

태릉의 능침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이 둘려있고, 그 주위에 열두 칸의 난간석이 서있다. 문무석인은 얼굴과 몸통의 비려가 1대 4정도로 몸집에 비해 얼굴이 상대적으로 매우 크다. 무인석의 얼굴에는 눈썹과 수염이 과장되게 조각되었고 뭉툭한 큰 코는 탐욕스러운 인상을 안겨준다. 미간의 주름이 강조되어 험악한 인상을 느끼게 한다.

혼유석, 장명등석 각기 한 쌍의 망주석, 문무석인, 마석 그리고 두 쌍의 양석(羊石), 호석(虎石)이 배열되어 있는 것은 <국조오례의>를 따른 상설이다. 그래서 태릉의 능침은 동구릉에 있는 조선태조의 건원릉(建元陵)보다도 더 웅장한 느낌을 준다는 평이 있다.

문무석인의 키가 345㎝로 조선 왕릉 중에서 그 키가 가장 크다. 그 옛날 태릉의 규모는 상소가 빗발 칠만큼 이야기꺼리였던 모양이다.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崇慕)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 조선은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다. 그리하여 42기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메드월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