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오래된 한옥마을 동남쪽 산비탈, 볕이 잘 들고 따뜻한 마을에 최근 재개발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연립주택으로 바뀌더니 아파트촌을 건설하기 위해 집들을 허물고 있는 중이다. 오래된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 곳곳에, 감나무, 살구나무, 복사나무 같은 과일나무를 가꾸고 있다. 라일락, 능소화, 철쭉, 무궁화 같은 화목류가 집집마다 서있는 아름다운 마을 이야기다

<서울의 나무, 이야기를 새기다>의 저자 오병훈씨의 나무지기의 도시 탐목기(探木記)에는 우리 서울의 환경에 적응한 석류나무 이야기가 흥미롭다. 석류나무는 어느 정도 굵은 줄기가 되면 목재 속이 썩고 그루터기에서 새 줄기가 자라서 세대교체를 한다.

늙은 원줄기는 새줄기를 가꾸어 세대교체를 해야 하는데, 그루터기에서 자라는 어린 줄기를 계속 잘라내면 끝내 말라 죽고 만다. 재개발 지역에 자라던 석류나무도 오래 살아있도록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런 석류나무는 서울 한복판에서 적응한 나무이기 때문에 유전자원 가치가 높은 나무이며, 오래 서울에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적이라 한다.

서울은 겨울이 길다. 남부지방의 석류나무를 옮겨 심으면 말라 죽기 십상이다. 서울 환경에 적응한 늙은 나무는 그만큼 가치가 있다. 나의 크리닉 창문 밖에는 이 여름 석류꽃이 만발하였다. 삼년 전 지인이 심어주었다. 첫해에 회초리 같은 줄기에 잎만 무성했고 한해 겨울을 지난 뒤에는 석류 한 알이 열었었다. 올해는 지름이 5cm정도로 자란 큰 나무에 붉은 석류꽃이 싱그러운 여름을 알리고 있다.

석류꽃은 5~6월에 가지 끝에서 나온 꽃자루에 적자색 양성화가 1~5개씩 모여 달린다. 꽃은 지름 3~5cm이며 꽃잎은 6개, 주름이 진다. 꽃받침은 육질의 통형이며 6갈래로 갈라진다. 여러 개의 수술에 한 개의 암술이 있다.

석류는 중부 이남 따뜻한 지방에 잘 자란다. 남도 지방엔 운치 있는 석류 고목이 많이 살아있다. 석류를 보면 꼭 붉은 비단 주머니를 리본으로 여며놓은 것 같다. 석류는 익으면 껍질을 터뜨린다. 그 속엔 촘촘히 박힌 투명한 알맹이가 루비처럼 반짝인다. 예로부터 보석을 간직한 주머니 같다 해서 사금대(沙金袋)라 불렀다. 열매는 익어가면서 꼭지 끝을 안으로 오므린다. 힘들고 고된 시집살이 그 서러움을 남몰래 삭이는 새댁의 모습에 닮았다.

사랑과 미움 그리고 격정의 여름을 참고 견뎌 찬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면 석류는 자신을 터트려 터진다. 새댁의 핏빛으로 멍든 가슴이 후련히 터지듯 석류 열매는 터진다. 흩어진다.

석류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하다. 꽃과 열매가 달려 있는 기간이 4~5개월이나 된다. 봄철 잎은 붉은 빛이 돌고, 입하(立夏)에 꽃이 피고, 중추(仲秋)에 열매를 맺는다. 가을엔 노란 단풍, 낙엽이 지고 겨울이 돌아와도 열매는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다.

석류는 붉은 꽃이 피어 빨간 열매로 익고 속에 든 씨 껍질도 새빨간 색이다. 예로부터 붉은색은 사귀를 제압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열매마다 주홍을 가득 품은 석류는 제액 방지물로 믿음을 주었다. 가정에선 장독대 옆에는 한 그루의 석류나무를 심었다.

석류는 조선시대 진상품이었다. 조선조엔 사슴의 꼬리, 좋은 술, 곶감 그리고 석류는 환심을 사는 선물이었다. 주머니 속에 자잘한 씨를 무수히 보듬고 있는 석류는 예로부터 자손의 번창으로 보았다. 딸의 혼수품에 석류를 수놓아 부귀다남(富貴多男)을 빌었고 그 열매 맛은 시어서 임산부들이 선호하는 과일이었다. 석류 많이 먹으면 득남한다는 속설도 있었으니... 석류를 과일 이상으로, 석류꽃은 귀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석류, 불수감, 복숭아는 삼다식물(三多植物)로 여겼다. 삼다(三多)는 자식을 많이 두라는 다남(多男), 복을 많이 받으라는 다복(多福),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다수(多壽)를 뜻한다.

고대사회에서 인구가 많다는 것은 곧 국력이 강대하다는 것을 말한다. 가정에 아들이 많으면 노동력이 풍부해지니 복이 아닐 수 없다.

석류는 그 재배역사가 긴 과일나무다. 석류의 원산지는 이란, 인도 북서부,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 기르기스스탄 공화국 등 해발 300~1000m 지대다. 석류나무는 우리 인류가 기르는 과일나무 중 가장 건조한 지역에서도 견디는 낙엽성 관목 또는 아교목이다. 원산지에선 벌써 2000여 년 전부터 재배했을 것이고, 지중해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한무제 때 장건의 서역정벌에 나섰다가 귀국할 때 함께 가져온 과일 나무가 석류나무다. 옛 당나라의 수도였던 지금의 시안(西安) 교외에도 대규모 석류나무 과수원 단지가 조성되어 약용이나 식용으로 중국 전역에 팔려나가고 있다.

이제는 중국, 인도, 서아시아,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 연안 등 여러 나라에서 재배한다.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 산악지대, 유럽에선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등 널리 심고 있다. 메세타 고원산지엔 50만㎢에 이르는 대규모 석류나무 과수원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국가적 특산물로 가꾸고 있다.

중국 남부지방에선 음력 5월에 피는 석류를 ‘5월의 꽃’으로 석류꽃 피는 5월을 ‘석류달(榴月)’이라 한다. 치아가 곱고 아리따운 입술을 가진 미인을 일컬어 ‘석류교(石榴嬌)’라 부르기도 한다.

석류나무의 학명은 Punica grandtum이다. Punica는 라틴어로 카르타고를 뜻하는 Punicus에서 따온 말이다. 석류를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원산으로 본 때문이다. gradatum은 씨가 입상(粒狀)으로 갈라졌다는 grandtus에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석류는 카르타고 원산으로 열매가 낱낱이 갈라지는 나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따뜻한 기후에서 자라는 석류는 명대(明代)에 이르러 중국 북부까지 전파되어 널리 심은 듯하다.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조선 사신 일행이 오랜 장마로 길이 막혀 숙소에 있을 때 그 뜰에 가득한 석류꽃을 기록하고 있다.

“석류꽃이 이 땅에 가득 떨어져 붉은 진흙에 섞였다.” 유화만지(榴花滿地), 세화홍니(鎖花紅泥)

조선시대 선비들은 석류나무를 사랑채 뜰에 즐겨 심기도 했다. 감안로는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서 “우리 집에는 화분에 심은 안석류 두 그루가 있는데 한 그루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열렸다. 마치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서 돌아보는 것 같았다. 머리와 얼굴, 꼬리와 목덜미, 갈지와 네 발톱까지 있어 부인들이 수놓은 사자와 같았는데 살아서 움직이는 모습은 그보다 나았다”고 썼다. 아마도 바람에 흔들리는 열매의 모양이 기이한 사자처럼 보였던가 싶다.

기독교 성서 속에도 석류는 신성한 과일로 등장한다. 새빨간 열매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표현되고, 풍요로운 땅을 맛깔스런 석류나무 정원이라 부르기도 했다. 신성한 나무로 믿었던 까닭에 성전의 원기둥 장식에는 석류나무를 장식했다. 석류나무의 꽃잎은 기사의 꽃무늬 장식에 들어있고, 왕관 모양의 꽃은 지혜로운 솔로몬의 왕관이라 굳게 믿고 있다.

히브리어로 석류를 림몬(Limmon)이라 한다. 이스라엘의 림몬에는 사도 바울이 6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쉬었다는 큰 석류나무가 자라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이브가 아담에게 따 준 금단의 열매는 사과나 무화과가 아닌 석류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성서의 무대인 소아시아에는 석류나무가 폭넓게 분포하는 식물인 때문일 게다.

석류나무가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8세기 경 중국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되어 일본에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암막새엔 문양으로 석류당초문을 통해 이미 석류가 번영과 풍요의 상징으로 생활 속에 뿌리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가에서는 가을에 벌어진 석류열매가 서리를 맞고 저절로 떨어지면 삼시주(三尸酒)라 하여 귀한 약으로 생각했다. 자연 발효된 석류열매를 먹으면 인체 내 세 가지 해충인 삼시가 취해서 장수한다 믿어왔다. 석류 껍질은 말려 약으로 쓰고, 씨를 감싸고 있는 피육은 날로 먹는다. 석류알을 붉은 오미자 물에 넣고 꿀과 잣을 타 마시는 석류화채는 여름 음료 중 백미다.

고려의 문인 이규보는 철심장을 가진 무정한 사람조차도 석류꽃 앞에서는 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고 석류를 찬양했다.

조선 성종 때 대사헌을 지낸 이육은 매화는 너무 일찍 져버리고, 국화는 너무 늦게 피는데 그 중간에 아름다운 석류꽃이 피었다고 읊었다. 석류꽃 앞에서는 철쭉도, 해당화도 모란도 그 아리따움을 당할 수 없다.

다산 정약용은 서울에서 벼슬살이 할 때 명례방(明禮坊)에 살았다. 지금의 명동지역인 명례방은 고관들 거주지역이라 수레, 말들이 길을 메웠지만 주위에는 연못이나 정원이 없었다. 살풍경한 주위에 싫증난 다산은 마당에 꽃과 과일나무를 심었고 그 중 석류도 있었다. 죽란화목기(竹欄花木記)에서 정약용은 17그루 석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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