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난운(積亂雲)! 소낙비구름, 우레소리, 그리고 우박, 갑작스런 기상변화, 뭉게구름이 빠르게 움직인다. 햇볕을 가리고 주먹 같은 물방울이 쏟아진다. 으아악! 소낙비다!

어린 학생, 밀짚모자 아저씨, 양복 입은 신사, 부인들 모두 뛴다. 길가 처마 밑에는 전깃줄에 제비들 앉아 지저귀듯, 하늘 쳐다보며 비를 긋는다.

한여름 무더위 대지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먼지를 일으키고 독특한 냄새 흙냄새, 고향의 냄새 그것은 생명의 근원 원시의 냄새다. 마을 정자나무 밑에도 동네 어른들 장기판이 시끄러워진다.

에미야! 장독 덮어라! 낮잠 즐기던 며느리 빨래 걷으랴 장독 덮으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봄비는 쌀비, 여름비는 잠비라 그리고 가을비는 떡비라.”

벼농사 벼 자라기만 기다리는 여름, 비오면 잠이나 청할 수 밖에...

얘! 에미야! 수제비나 해먹자!

산 아래동네 삼청동 이젠 골동품 가게, 명품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섰다. 인사동이 포화상태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밀려왔다. 산 아래 맛집! 삼청동 수제비집은 등산인들이 몇 시간 줄서 한 그릇 먹고 집으로 가는 명소! 그곳은 변함이 없다.

수제비(표준어), 밀가루뜨더국(문화어)은 한국 전통음식 이름이다.

수제비는 손으로 적당히 뜯어 밀가루 반죽에 다양한 채소를 곁들여 끓여먹는 국이다. 맛과 조리법은 칼국수에 유사하나 칼국수는 밀가루 덩어리가 아닌 국수로 만든다는 차이가 있다. 빈대떡과 함께 비 오는 날에 먹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멸치, 조개, 다시마들이 재료로 사용되며 오랜 시간에 걸쳐 국물을 낸 뒤 국수를 더하고 호박, 감자나 김치를 곁들인다.

수제비와 국수는 고려시대부터 먹기 시작 수제비라는 단어는 조선 중기에 만들어졌다. 손을 뜻하는 한자 수(手)와 접는다는 의미의 ‘접(接)’이 합쳐져 ‘수접(手接)’이라 부른데서 나왔다.
북한에선 밀가루뜨더국 ‘밀가루를 뜯어 만든 국’에서 나온 말이다. 경기, 강원에선 뜨레기 또는 뜨더국,

전남에선 떠업죽 또는 띠연죽, 경남에선 수지비, 밀제비, 밀까리장국, 전남 여수, 경북 봉화에선  다부렁죽 또는 벙으래기라 불렀다. 청송 주왕산 오지마을에선 ‘던지기탕’으로 부른다.
수제비는 향수를 자극하는 음식이다. 애호박이나 김치를 썰어 넣고 끓인 수제비를 먹으면 고향집과 어머니의 손맛이 떠오른다.

중년층에게 수제비는 아픈 추억이다. 배고프던 시절에 먹던 음식이기에 애증마저 느껴진다. 수제비는  한국인의 감성을 자극한다. 수제비를 6.25전쟁 때 구호물자로 들어온 밀가루에서 비롯된 음식쯤으로 아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유래를 알고 보면 수제비에는 의외의 사실이 많이 담겨있다.

수제비는 역사가 오래된 음식이다. 수제비라는 음식 이름은 최소한 조선 중기 이전부터 있었던 낱말이다. 이미 그때 벌써 외국어 사전에 수록될 정도로 비교적 익숙해졌던 음식이었을 것이 허드레 음식이란 설명도 소개된 것도 아니다.

그 책 속의 설명에 밀가루 음식 만드는 법 중에 반죽을 손가락 크기로 주물러 끓는 물에 젓가락으로 끊어서 넣어 만든다고 설명해 놓았다. 반죽을 손으로 뜯어 넣는지 젓가락으로 끊어 넣는지는 차이가 있을 뿐 지금의 수제비와 크게 다를 게 없다.

6세기라 하면 국수가 막 생겨날 무렵이다. 곡식가루를 반죽해 손이나 젓가락으로 뜯어 넣어 끓이는 수제비야말로 국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우리나라에는 기록이 적어 수제비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고증할 길이 없다. 고려시대 말의 수확량이 적어 중국으로부터 수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밀을 주재료로 하는 수제비를 서민의 음식으로 보기는 어렵다. 수제비가 서민의 음식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조선시대의 수제비는 ‘운두병(雲頭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조선 중종12년 1517년에 발행된 중국 북위(北魏)때 가사협이 쓴 동업서 사성통해(四聲通解)라는 책에는 수제비란 단어가 나오고, 박탁(??)이란 설명에서 속언(俗言), 우리말로 수저비(水底飛)라 부른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16세기 초반 이전부터 수제비를 먹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 기록된 운두병의 조리법을 보면 좋은 밀가루에 다진 고기와 파, 장, 기름, 후춧가루, 계피가루 등을 넣고, 되직하게 반죽하였다. 닭을 삶아낸 장국물에 이 반죽을 숟가락으로 떠 넣어 익힌 다음에 그릇에 담아 닭고기를 얹어먹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조리법은 서민들의 음식이라기보다는 양반가의 음식으로 짐작된다. 다분히 양반층으로 시작된 수제비는 6.25전쟁 이후 다량의 구호물자로 유입되면서 서민들의 중요한 주식으로 변형되었다. 생활수준이 향상된 오늘날에는 주식이라기보다는 가난했던 지난날의 향수가 어린 별미음식의 성격이 강하다.

고 최진실은 연예인으로 성공을 한 뒤에 수제비는 먹기 싫어했다. 지방에 따라 올갱이처럼 만들어 넣은 수제비를 해먹기도 하는 유행도 생겼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포구에는 단호박 꽃게탕이 유명하다. 수제비를 띠운 꽃게탕은 인기만발이다.

수제비를 뜨다 반죽한 밀가루를 조금씩 떼어 끓는 맑은 장국에 넣은 수제비는 맛을 돋군다. ‘물수제비 뜨다’라는 말이 생겼다. ‘수제비 태껸’이라면 어른에게 버릇없이 함부로 덤벼드는 말, 다툼이란 뜻이다.

수제비는 밀가루로 만든 밀수제비, 밀가루를 된찌꺼기로 만든 노깨수제비, 통밀을 맷돌에 갈아 만든 막갈이 수제비가 있다. 이밖에 메밀가루로 만든 메밀수제비, 감자녹말로 만든 감자수제비, 칡뿌리 녹말로 만든 칡수제비, 어린 보리싹을 볶아 찧어 만든 보리수제비, 보리쌀을 대낄 때 나온 겨를 반죽하여 만든 겨수제비, 송기가루로 만든 송기수제비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수제비 만드는 법은 장국이 끓을 때에 반죽을 손으로 뜯어 넣는 방법이 있다. 이밖에도 반죽한 것을 조금 떼어 내어 손으로 비벼 5cm가량의 길이에 손가락 굵기 정도로 만들어 장국에 넣는 방법이 있다.

수제비는 물의 분량이 많아서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의 영양분을 섭취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수제비를 먹을 때는 되도록이면 채소, 육류, 생선 등을 함께 섞어 먹는 것이 좋다.

수제비는 넉넉지 못했던 시절에 먹던 음식이니 주로 서민음식이로 생각하기 쉽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수제비 만드는 재료와 방법에 따라 잔치국수처럼 양반집 잔칫상에도 놓였다.

잔칫상에 올렸다는 수제비는 밀가루가 귀했던 시절 밀가루 또는 쌀가루로 만든 것이었다. 지금 쌀수제비 끓인다고 하면 낯설게 들리지만 어른들 말씀 들어보면 예전엔 농촌 추수기에 추수가 끝난 때 곡식이 풍부해지면 밀가루 대신 쌀가루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고 하신다.

추수가 끝난 후 쌀은 있지만 밀가루는 없고, 쌀과 밀가루 살 현금이 없으면 쌀가루로 쌀가루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쌀이나 밀가루 반죽을 떼어 장국에 넣으며 둥둥 떠서 끓는 모양이 물고기 헤엄치는 듯하다 해서 수제비는 발어(拔魚)라고도 불렀다.

조선 숙종 때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영롱발어’란 별식을 소개하고 있다. 메밀가루를 반죽해 잘게 썬 쇠고기나, 양고기와 함께 수저로 떠서 팔팔 끓는 물에 넣으면 메밀로 된 수제비는 뜨고, 고기는 가라앉는다. 그 모습이 영롱하고, 여기에 표고버섯, 석이버섯, 소금, 장후추, 식초로 간을 맞춰먹는다 했는데 고급 메밀수제비였다. ‘산약발어’는 산약(山藥)으로 마를 넣어 만든 수제비다. 메밀가루, 콩가루, 마를 섞어 수저로 떼어 끓는 물에 넣어 만들어 먹는다.

영동발어, 잔약발어는 모두 원나라 때 <거가필용(居家必用)>이란 요리책에도 수제비 별식으로 나온다 하니 별미수제비의 역사는 무진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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