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땅이 눈 앞, 분단의 아픔을 품은 섬 속의 섬, 무심한 섬 하나, 빼어난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저 조용히 자리만 지켜온 섬, 인천광역시 강화 옆의 교동도, 국내에서 12번째로 큰 섬이다. 휴전선이 섬을 휘감아 교동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엄격한 통제 속에, 외면 받았던 땅이다. 통제의 사슬은 개발의 손길을 막아, 원형의 자연과 우리 농촌의 순박함을 그대로 지켜주었다.

섬은 하루 종일 안개에 묻혀 속살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안개 낀 날은 맑은 날이 되리라는 예상을 간직하며 섬을 찾아간다. 마치 드라이아이스를 피워놓은 것 같은 해무(海霧)는 섬을 한층 더 신비스럽게 만들고 있다.

교동도(喬桐島). 동,서로 약 12km, 남북이 약 8km, 둘레 37.5km에 그 면적은 47.2㎢의 삼각주(三角洲)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입구. 오랜 세월 강에서 흘러든 퇴적물이 쌓이고 쌓여 섬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교동은 동북쪽의 화개산, 북쪽의 율두산, 서남쪽의 수정산을 중심으로 3개의 도서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교동평야 지역에는 항시 조수가 흘렀다 전해지고 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해조류의 영향을 받고, 고려 시대에는 도민들이 간척공사를 일으켜, 한 개의 섬으로 태어났는데, 섬의 지질은 충적토로 기름진 땅이다.

교동도 북쪽 해변은 황해도 연백군과 마주하는 DMZ의 남방한계선이다. 율두산, 율두포, 지성리 망향대(망배단)에선 황해도 연안읍이 보인다. 기차의 기적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그 거리 3km. 교동도의 4면 바다따라 율두포, 북진나루, 낙두포, 그리고 동쪽의 북단에 호두포, 다시 남으로 내려오며 월선포, 동진포, 남산포, 반장포, 죽산포에 밀탄포가 포진하고 있다. 어촌과 교통의 요지 관광객들은 회집을 찾아든다.

교동도의 역사는 흥미를 더한다. 2005년 교동사랑회는 교동 답사에 나서 화개산(華蓋山, 296m)에서 성혈(星穴, 바위구멍그림:선사시대의 자연숭배신앙의 일종)을 발견 확인하였다.

성혈(바위구멍그림)이 새겨진 바위는 청동기시대 이후의 유적으로 하늘의 별자리, 풍요와 다산, 장수, 태양 또는 자연숭배의 마을제단 등 민간신앙의 일종으로 바위구멍을 통한 주술적 행위의 흔적이다. 주로 고인돌에서 볼 수 있으나 자연 암석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 바위는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높은 지점인 점을 고려해 볼 때 자연숭배 신앙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

서울대학교 답사팀은 1962년 고구저수지에서 돌화살촉 등을 발견하였다. 교동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유물들이었다.

고려시대엔 중국으로 오가는 국제무역의 중간 기착지이며 개경에 이르는 벽란도의 관문으로 물물교환이 성행했으며 중국의 사신들이 머물렀던 사신관저와 사신당(使臣堂)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해상전략적 요충지였다. 조선 인조7(1627)년에는 경기수영(京畿水營)으로, 인조11(1631)년에는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을 설치하여 군사관할구역으로 삼산(三山), 서도(西島), 옹진(甕津), 장봉(長峰), 덕적도(德積島)에 이르고, 충청도와 황해도까지 전함을 배치하고 군기를 축척하여 서, 남해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읍내리 남산포 일대가 조선 초기 월곶진터이다. 근세 선착장의 개축으로 일대의 경관이 상당히 변질하여 당시 모습은 살필 수 없다. 안내판 이외엔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인근 주택 사이에 당시 설치되었던 함정의 계류석이 남아있다.

교동(喬桐)의 지명에서 ‘높을 교(喬)’자와 ‘오동나무 동(桐)’의 의미에서 이 땅에 키 큰 오동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이름 붙여졌다고 전한다.

교동읍성(喬洞邑城)은 읍내리에 있다. 1626(인조7년)에 축조한 것이며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의 본진이었다. 그 주위 305m, 높이 2.4m 옹성이 셋이고 치성이 4이며 동, 남, 북 3문과 소남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교동 읍성의 둘레(길이)에 관한 각계의 조사보고서의 기록상에도 차이가 있다. <전국문화유적총람(1977)>에는 430m, 강화군과 육군박물관의 조사보고서에는 779m(2000년), 강화군과 인하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보고서(2007)에는 856m로 기록되어 있다.

1753(조선영조29)년 통어사 백동원이 치첩을 수축, 1884(조선고종21)년 통어사 이교복, 서문루, 치첩을 수축하였으나 그 역사(役事)를 못마치고 물러났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성은 무너져 훼손상태이며, 일부 구간의 성채와 잔석이 남아있어 읍성이었음을 보여줄 뿐이다. 각문에는 각주가 있었다는데, 남문은 유량루(庾亮樓),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북문은 공북루(珙北樓)라 불렀다. 현재 남문의 홍예만 남아있다. 남문은 고구려 때 고목근현(古木根縣)의 초소라고도 알려져 있다.

1395년 (조선태조4년)에 설치하여 만호겸지현사(萬戶兼知縣事)를 두었던 월곶진(月串鎭)은 현으로 승격하여 현감을 두었다가 1629년(인조7년)에는 경기수영(京畿水營)까지 월곶진에 이설되면서 교동현(喬洞縣)이 교동부로 승격했다.

현(縣)의 부지(府地)에는 객사(客舍), 관아(官衙)를 갖추었고, 교련관청, 인해루 등이 있었고, 현재는 돌계단 20여 개가 남아있어 삼도수군통어영을 관장하던 본영(本營)다운 그 규모를 짐작케 한다. 안해루의 누각 석주(石柱) 4개 중 2개가 남아있고, 2개는 현 교동초등학교의 전신인 교동공립 보통학교의 교문기둥으로 쓰다가 학교 운동장 한쪽에 세워놓고 있다.

‘섬 속의 섬’ 교동의 세시풍속은 특이한 점도 있다. 동제(洞祭)의 명칭을 ‘산제사’라고 한다. ‘산단지터’에서 지낸다. 화계산 남쪽 화개사 좌측에서 200m쯤 올라가면 석단(石壇)으로 된 제단이 있다. 당신(堂神)은 산신(山神), 직신(稷神?곡식을 관장하는 신), 사신(社神:토지의 신)으로 3개의 단을 만들었다.

음력 정월 말에서 2월 초 길일을 잡아 밤11시에 제를 올린다. 음식 만드는 사람 화정(火鼎)들은 제사 지내기 전날 산에 올라 자고, 음식은 모두 산에서 만든다.

제물 돼지에게 “가십시요”, “가십시요”... 강제로 이끌지 않고, 존댓말로 제사장에 인도한다. 돼지에게 큰절, 희생의례 끝나면, 날고기를 제상에 올린다. 유교식 제사, 전설도에 맞추어 상차림, 고기는 생고기, 나물은 올리지 않는다.

연산군의 사지(死地), 읍내라 성내마을의 부근당(扶芹堂)의 당제도 이채롭다.
연산의 화상을 모신다. 당앞에 천막을 치고 4박 5일 정도로 굿을 올렸다. 이장이 쌀을 각출하고 행사는 주로 여자들이 주도했다. 봉소리 종머루 사는 만신이 매년 굿을 했다하며, 마을을 돌고 동진포 장승을 돌아 남산포 사신당을 다녀와 부근당에서 굿을 했다한다.

옛날 당굿 때는 연산의 원한에 사로잡혀 무당이 선혈이 낭자할 때까지 처박히고 나둥구는 형용을 해야 굿이 끝났다 하며, 폐주가 죽은 섣달에 섬처녀 하나씩 골라 당집에 등명(燈明)하는 처녀봉공(處女捧供) 풍습도 있었다니... 등명들고 난 연산각시는 귀신이 붙었다 하여 혼인하려 들지 않아 육지에 나가 무당이 되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강화(江華)는 교동도와 석모도, 볼음도, 주문도, 서검도, 미범도, 말도 등 10개의 유인도와 남섬, 대섬, 와도 등 15개의 무인도를 거느리고 있다.

석모도행 배는 외포리에서 떠난다. 연육교가 되기 전 교동도행 훼리보트는 강화본섬 창후리에서 떠났다. 조석 간만의 차이가 큰 서해안 지역이라 밀물 때에는 15분 정도면 교동도 월선포에 닿았지만 썰물 때를 만나면 50분가량 걸렸다.

교동도 앞바다에는 석모도 상주산, 오른편 교동도 화개산이 길게 누워있다. 배를 타고 건너가려는데, 강화의 해안을 따라 배는 계속 남진이다. 간조기에는 물이 낮아 빙 둘러갔다.
나지막한 진흙섬, 걸쭉한 서해바다를 가로질러 가고 있는 훼리보트의 선미(船尾)에는 물보라가 해상 신작로를 내면서 건너갔었다.

옛날에 교동은 연산군?안평대군 등 왕족의 유배지였다. 전남의 해남지역이 선비들의 유배지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에서 패한 인물은 한양에서 먼 곳으로 보내졌지만 왕권에 치명적일 수 있는 왕족 등 거물은 가까우면서도 완전히 격리된 곳에서 늘 동정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었을 게다. 한야에서 이틀거리인 교동도는 해안과 가깝지만 급한 조류로 접근이 쉽지 않아 유배지로서 최적의 땅이다.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을 시작으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됐다. 조선 왕조의 풍운아,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은 교동으로 유배돼 2개월 만에 사망했다. 봉소리의 산골, 고구리의 연산골, 읍내리 세곳으로 추정되는 연산군의 유배지는 추정으로 회자될 뿐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메드월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