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강북지역,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길은 서울 성곽길이다. 한양(서울) 성곽길은 모두 4개 구간으로 나뉘어져있다. 지금까지도 소실부분은 복원 사업 중에 있다. 북악산, 인왕산 구간은 복원이 완료되어있다.

서울 성곽길 1구간은 숭례문(崇禮門)을 출발 남산(南山,262m)을 지나 장충체육관까지 이어진다. 소월길로 향하면 남산육교를 건너게 된다. 힐튼호텔 주차장까지 이어진다. 소월로 도동삼거리를 건너면 남산공원이다.

소월길 따라 남산공원길로 돌아 111계단을 오르면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다. 계단 꼭대기에 있는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옛 어린이 회관, 국립중앙도서관) 동쪽으로 삼순이 계단을 내려다 볼 수도 있다. 남산 위용을 감상하면서 걷는 길은 소나무숲길이다.

남산 정상을 지나, 장충동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어가면, 팔각정 휴게소를 만나고 성벽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숲길을 빠져나가 국립극장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따라, 성곽길을 감상할 수 있다. 성곽길 제1구간은 국립극장 건너 자유총연맹 동쪽 뒷길로 이어지며 장충체육관 근처에서 끝난다.

숭례문 주소는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40이다. 1395년에 짓기 시작해 1398년에 완공했고 조선 세종 때 보수공사를 했으며 1479년 조선 성종 때도 큰 공사를 한 기록이 전한다. 1962년 국보 1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 2월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홍예만 남기고 목조건물로 된 문루는 완전히 소실되었다. 숭례문 건립 이래 최대규모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숭례문화재 5주년 마무리공사가 완료되었다. 동서로 53m, 16m 성곽 그리고 전통기와 단청이 원형 복원되었다.

숭례문을 중심으로 성곽 남쪽은 남산방향 소월길로, 북서쪽은 서소문 방향 대한 상공회의소 건물 앞 숭례 성터길로 이어진다. 남산에서 만날 수 있는 서울 성곽은 총길이가 1693m이다. 최초로 축적 작업은 1395년 도성축조도감에서 진행했는데, 1396년 1월 9일부터 단 49일만에 백악산, 인왕산, 면목산(남산), 낙타산(낙산) 등 내사산(內四山) 전 구간 약 18㎞에 이르는 곳에 성곽을 쌓았다. 내사산 중 높고 험한 곳에는 토성으로 쌓았다.

전쟁과 일제강압시대에 개발이란 명목 하에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1970년에 이르러 도성복원위원회를 조직해 지속적인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남산 성곽은 장충동 성곽과 함께 1978년말에 복원되었다. 지금 백범광장엔 이승만 초대 대통령 동상이 있었으나 4·19혁명 이후 철거되었다. 1968년에 백범광장을 조성, 김구선생의 동상이 세워졌다.

분수대공원은 광장 둘레길을 따라 접근 할 수 있다. 백범광장 앞을 지나 111계단에 오르면 안중근의사 기념관, 교육연구정보원, 남산도서관이 있고, 분수대 건너 남산으로 올라가는 성곽길을 맞게 된다. 2010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신축된 기념관에는 안의사의 영정, 친필, 옥중서신, 옥중자서전,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남산 올라가는 계단 옆으로는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고, 개나리 천국에는 상춘객이 모여든다. 약동하는 서울의 다이내믹 파노라마 감상 포인트다. 산책로 어디서나 남산의 실루엣을 보는 전망은 황홀한 파노라마다. 남산의 옛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이다. 그 의미는 마뫼요 남쪽에 있는 산이란 뜻이 된다.

남산은 1910년 이래 공원이 되었는데, 조선 고종은 ‘한양공원’이란 이름을 내렸고, 친필 돌비석을 세웠다. 남산 도서관은 자연과학대계열 도서관의 특징을 지녔다. 1922년 중구 명동에 경성부립도서관으로 설립되어, 1964년 현 위치로 옮겨 100년 역사를 자랑하게 되었다.

서울N타워에 있는 전망데크는  서울 도심은 물론, 정부청사가 있는 광화문, 인왕산, 북악산 북으로 북한산, 도봉산 동쪽으로 수락산, 아차산을 조망할 수 있다. 연인들의 포토 포인트! 날씨 맑은 날 전망대에 오르면 북한 땅 개성 송악산이 보인다. 실향민들의 망향대다. 전망대 앞 ‘사랑의 자물쇠’는 명물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건물붕괴 위험이 걱정거리다.

남산엔 조선 초기로부터 1894년(고종31년) 갑오경장 때까지 500여 년 간 다섯 곳 봉수대를 설치 운영했다. 봉수는 횃불과 연기로 위급한 소식을 전하던 고대통신수단이었고,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을 피웠다. 서울시는 1993년 9월 다섯 곳의 봉수대 가운데 제4봉을 복원하였다.

1968년 11월 11일 건립한 건축물 남산 팔각정은 그 건립날짜가 11월 11일이어서 젊은 세대들에게 빼빼로데이 데이트코스로 인기상종가다. 팔각정은 신의 세계를 상징하는 사각의 중간각으로 신과 인간의 소통을 뜻한 건축물이다.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을 기념하기 위해 그분의 호를 딴 ‘우남정’이었으나, 4·19혁명 때 철거되었다.

1972년 전파탑으로 시작한 N-서울타워는 나날이 그 기능을 확장해 오다가, 종합관광지 명품타워로 변신하였다. 전파송출이 기본기능이다. 우리나라 공중파의 50%이상이 이 Tower전파탑을 이용한다. 1980년 개방되어, 회전하는 전망대와 레스토랑 창가에 앉아 서울 전경을 모두 볼 수 있다. 이제는 서울의 랜드마크의 하나로 급부상했다.

남산 팔각정 광장에서 국립극장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순환버스 정류장이 나오고 그 앞에 팔각정 휴게소가 있다. 휴게소 옆에 통행로를 발견하면 찾아 들어서기만 하면 눈앞에 넓고 푸른 숲을 발견하면 대박이 터지는 곳이다. 흔히 성곽순례 그만두고 이 길에서 하루 종일 걸어도 후회 없을 낭만의 자연로요, 산책길이다. 그래서 ‘대박!’을 연발하는 곳이다.

서울 성곽 제1길을 숭례문이나 장충체육관을 출발하여 걸어가면 그 산책길을 약 6.5㎞ 약 4시간이 소요된다. 장충체육관과 국립극장은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5번 출구에서 찾아가는 것이 더 멋지다. 장충체육관은 새로 단장되었다. 그 이름 ‘남산 소나무 숲길!’
 
서울 중구와 용산구에 살고 계신 시민들은 이런 길이 이곳에 있다는게 놀라울 따름이다. 평생 서너 번 남산 출입을 하는 타지역 사람들에게는 감격스러운 공간이 이 숲길이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 유난히 돋보이는 나무들이 있다. 늘푸른나무, 상록수들이다.

소나무는 오래전 전부터 우리 민족의 삶 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문간에 금줄을 치고 솔가지를 끼워 나쁜 기운을 막고,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살다가 솔가지로 불을 지펴 밥을 짓고, 나무껍질에서 꽃가루까지 많은 먹거리를 제공한다. 죽어서 들어가는 관(棺)도 소나무관을 최고로 치며, 소나무가 있는 산에 묻힌다. 우리민족이 소나무를 사랑하여 가슴에 담을 이유는 척박하고 어려운 환경을 견디며 살아남았음에도 여전히 푸르고, 올 곧은 그 풍모가 아닐까.

소나무 중에서도 특별히 아름답고 올곧게 올라가서 늠름한 금강송은 바람을 받기 좋은 강원, 울진, 삼척 등지에서 자라는 소나무다. 날씨 좋은 남쪽 땅에서 춘양목이 되나 소나무의 장대한 모습은 찾기 어렵다. 더구나 소나무를 도시 정원수로 심은 것은 어찌 할 건가 몰라.

요즘 문화재 복원에는 동해안에서 자라는 금강송(金剛松)이 많이 쓰인다. 황장목(黃腸木), 춘양목(春陽木)으로도 불리는 이 소나무는 “살아서 1,000년 죽어서 1,000년을 간다.”고 할 만큼 굵고 길고 튼튼해서 전통건축물을 짓는 대목장(大木匠)들이 좋아한다. ‘숭례문과 소나무’ 지난 몇 년간 큰 이슈가 아니었나.

“어명(御命)이요.” 산 속 정적을 깨뜨리며 외침이 울리자 벌목꾼은 울긋불긋 색띠를 두른 소나무의 밑둥치를 도끼로 내리친다. 외침이 몇 번 되풀이 되고 그때마다 도끼질을 한다. 그렇게 벌목의식이 끝나고서야 기계톱 차례가 온다.

수백 년 살아온 아름드리 소나무의 목숨을 뺏는 일엔 그렇게 절차가 있다. “어명”을 반복하는 것엔 임금의 명에 따라 궁궐재목으로 쓸 나무를 벨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알려 나무의 원혼을 달래주려는 조상들 마음이 담겨있다. 강원도 삼척 준경묘(濬慶墓)에서 “어명이요” 외침이 울려 퍼졌다.

숭례문 화재 와중에 현판(懸板)을 구해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했다. 불길인 문루(門樓)에 번지기 시작하자 한 소방관이 현판의 대못을 뽑아내고 바닥으로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살려낸 것이었다. 그 현판의 키는 3.5m 폭 1.5m 무게는 150㎏이나 되는 육중한 현판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데 전경(戰警)이 8명이나 동원되었다. 화재당시의 기록이었다.

서울 성곽길 제1길을 걸으면서 소나무 숲길과 숭례문의 소나무 이야기를 상기하면서, 갑판권 교수의<조선을 구한 신목(神木), 소나무>에서 소나무가 방위에 중요한 재료로 부각되었고, 100년 재목 수백주(株) 위치가 재확인되었다 저자는 임진왜란을 ‘조선거북선과 일본 안택선(安宅船)의 싸움, 거북선은 소나무로, 안택선은 삼나무의 싸움이었다고 정리하였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메드월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