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겨울 추억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길거리 군고구마는 이제 어쩌다 볼 수 있는 귀한 존재가 됐다. 10여 년 전만 해도 길에서 흔하게 사 먹을 수 있었던 그 많던 군고구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찐고구마보다 군고구마가 더 달콤하다. 군고구마는 고구마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다. 고구마속 녹말이 β-amlyase의 작용 하에 당분으로 변한다. 끓는 물, 고온의 찜통 속에선 β-amlyase는 활동하기 어렵다.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며 구워질 경우엔 비교적 오랜 시간 활발하게 작용해 고구마의 단맛을 높인다. 고구마는 건강식품으로 100g당 식이섬유 2.6g, 감자는 100g당 0.7g 들어있다. 섬유질이 감자의 4배 많아 작은 양으로도 포만감을 느낀다. 비타민A는 감자의 19배, 비타민C는 3배 들어있다. 
 
고구마의 원산지는 중앙아메리카 또는 남아메리카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프랑스 국제농업협력연구센터 연구진이 고구마 게놈으로 인류의 활동증거를 밝혀냈다고 한다. 그리고 고구마의 이름을 연구한 결과 남미지역과 폴리네시아에서 고구마를 ‘쿠마라(kumara)'비슷한 이름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한다. 
 
이는 스페인계의 카미테(cmate), 포르투갈계의 바타타(batata)와 확연히 다른 이름인, 폴라네시아 사람들이 남미에서 고구마를 수입했다는 방증이 될 수 있다. 고구마가 한반도에 전래된 시기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1764년(영조40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재야학자 이광려의 특별한 부탁을 받고 쓰시마(對馬島)에서 가져왔다. 조엄의 일본방문기(海?日記)에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대마도에 먹을 수 있는 풀뿌리가 있는데 생김새가 마나 무 뿌리 같기도 하고 토란이나 오이와도 닮았는데 모양이 일정하기 않다면서 “이름은 감저(甘藷)라고도 하는데 왜(倭)의 발음으로는 고귀위마(高貴爲痲)다 라고 적었다. 또 효자마(孝子痲)라고도 한다.”고 했다. 
 
고구마의 일본이름은 사쓰마이모(薩摩芋)인데 사스마 사람들은 고코이모(孝行苧·こうこういも)로 쓰고 한자로 표기한 것인데 대마도에서만 사용하는 언어다. 그것을 조엄이 ‘고귀위마(高貴爲痲)’로 표기한 것이다. 
 
또 한가지, 본래는 고구마를 원래 감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감자한테 이름을 내주고 대신 고구마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흔적이 지금도 제주도 사투리에 남아있다.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감저(감자)라고 한다. 그 대신 감자는 지슬이라고 부른다. 고구마를 한자로는 감저(甘藷)라고 썼다. 저(藷)는 마라는 뿌리 작물이고, 감(甘)은 달다는 뜻이나 모양은 마처럼 생겼는데 맛은 달콤하다는 의미이다. 
 
한중일 한자문화권에서는 모두 고구마를 감저로 표기했다. 그런데 고구마보다 61년이 늦은 1824년에 감자가 북쪽에서 전해진다. 이때는 감자를 고구마와 구분해서 북감저(北甘藷)라고 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희는 1820년에 지은 <원본물명고>에서 고구마를 ‘감저’로 표기하고 한글로 ‘고금아’라고 했다. 고구마를 ‘조저(趙藷)’라고 하는 것은 조엄이 전파한 고구마란 뜻이다.
 
 
한반도에 전해온 지 250년이 되는 고구마에는 서민들의 애환이 배어있다. 조엄은 고구마를 부산으로 들여왔다. 고구마는 주로 남쪽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작물이어서 재배지역이 제한됐고, 또 잘 썩기 때문에 저장도 어려웠다. 반면 감자는 아무 곳에서나 쉽게 자라기 때문에 구황작물(救荒作物)로 큰 역할을 했다. 고구마보다 감자를 많이 먹게 되면서 감저(甘藷)는 감자를 가리키는 단어가 됐고 고구마라는 이름을 얻었다.
 
영어로 우리말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1492년 미주대륙을 밟은 콤럼버스는 귀국하면서 아이티에서 바타타(batata)라는 이름을 가진 고구마를 가지고 돌아온다. 영서 포테이토(potato)의 어원이 되는 단어로 유럽에서는 처음에 고구마를 포테이토라고 불렀다. 고구마와 비슷하게 생긴 작물 감자가 고구마보다 조금 늦게 유럽에 전해지면서 사람들은 감자를 고구마와 구분해 하얀고구마라는 뜻으로 화이트 포테이토(white potato)라고 불렀다. 
 
유럽 사람들은 고구마재배에는 실패했다. 그래서 고구마가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감자는 16세기 중반에는 벌써 아일랜드까지 재배지역이 확대되면서 감자는 유럽의 중요 식량으로 자리 잡았다. 감자와 고구마의 운명은 갈렸다. 처음 고구마를 가리키던 포테이토라는 단어가 사람들이 주로 먹는 양식작물(糧食作物) 감자를 나타내게 됐고 고구마는 그 대신 ‘달콤한 감자’라는 뜻을 지닌 스위트 포테이토(sweet potato)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구마 종자가 들어왔을 당시 농민들은 앞다퉈 심었다. 고구마는 구황농산물이 될 수 있어 허기를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탐관오리들은 고구마순을 백포기 씩이나 수탈해 갔고, 아전들은 고구마 밭 한 이랑씩 거둬갔다고 하니 나날이 재배농가는 줄어들어갔다.
 
“고구마는 조금만 심어도 수확이 많고,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달고 맛있기가 오곡과 같다.”이는 명(明)나라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서광계의 ‘농정전서(農政全書)에서의 고구마 예찬론이었다.’ 고구마의 장점을 왕실에 상소한 학자들과 대신들이 있어 19세기 초 다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강필리의 <강씨감저보>, 김장순의 <김저신보>,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노력이 힘이 컸다.
 
 
길거리 군고구마, 겨울 추억은 거리에서 사라지고 겨울날의 추억만 남아있다. ‘거리에서 겨울철 별미(別味) 군고구마가 사라졌다.’ 군고구마가 거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가격상승이라고 한다. 서울 송파구 가락도매시장 채소구역 100여개 넘는 채소가게 중 고구마 취급 상점은 50여개, 고구마 10㎏ 한 상자에 2만2,000원~3만원, 1㎏ 단위로 4,000원이며 1㎏이며 어른 주먹크기만한 고구마 4개, 20년 경력 도매상인은 처음 장사 시작할 때보다 고구마 가격은 3배 뛰었다고 귀뜸한다. 덩달아 고구마 생산량도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 1990년대 43만 톤 생산량은 2005년에 28만 톤으로 줄었다가 2013년 이후엔 wellbeing식품으로 귀한 몸값을 받게 된 이후의 일이다.
 
우리의 겨울간식 군밤, 붕어빵, 호떡 등 다른 겨울간식과 달리 원재료 의존도가 절대적인 고구마는 비싸게 팔 수 밖에 없다. 가격이 오르는데 농민들은 왜 고구마를 심지 않는가. 고구마는 저장할 때 섭씨 7~8도 이하 저온에서도 곧 썩는다. 장기 보관 유통장비 curing장비는 1~2억, 고구마 1㎏ curing비용은 평균 1,000원 이란다.
 
고구마는 수입금지 품목이다. 생고구마 수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고구마 흙, 개미바구미, 고구마바구미 같은 해충이 묻어 들어 올 위험성이 크고, 국내에 없는 해충이 잘못 들어오면 국산 고구마는 씨가 마른다 하니.... 군고구마는 판매업자 입장에서는 ‘안 남는 장사품목’이 된 셈이다. 
 
소비자는 집에서 구워먹는 쪽이 되어 2000년대 후반 건강식품으로 주목받아 ‘직화냄비’가 등장했다. 그 가격이 군고구마 6개 값 정도라 한다. 지금은 한달 평균 1,400개가 팔린다. 이제 귀하신 몸 군고구마는 길거리에서 사라져, 백화점과 대형마트로 진출했다. 
 
우리 고구마가 더 변신하고 있다. 전남 해남군이 생고구마를 씻거나 구워서 영국, 독일, 슬로바키아 등지로 수출한다고 한다. 구황식품의 대명사 고구마가 1차 농산물에서 2차 수출용 가공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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