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최수부 회장의 고단했던 유년시절은 ‘끝장’을 보고야 마는 그의 뚝심을 만들었다. 이미 그 무렵부터 다듬어진 끈기는 운명적인 제약인생의 시작부터 맨손으로 세운 광동제약의 탄생에 일조했다. 그러나 첫 시작은 항상 그러한 듯, 결코 순탄치 않았다. 故 최수부 회장, 그만의 ‘창업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저서 ‘한국을 빛내는 CEO' 참조)

광동제약사 창업, 신용을 생명으로…
처음 최수부 회장이 큰 꿈을 안고 창업한 광동제약사는 가내공업에 불과한 군소업체에 초라한 제약사였다. 창고에 약재 재고가 바닥난 상황에서 급하게 거래처에서 납품 요청이 오는 날에는 약재를 구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거래처와의 신용을 져버릴 수 없었던 그는 약재상과의 작은 마찰을 감내하고 외상으로 약재를 구했다. 이후 그가 곧바로 전화상에 전화기 2대를 맡기로 돈을 마련해 약재상 주인에게 약재 값을 지불한 일화는 그가 신용을 얼마나 중요시 여기는지 보여줬다.
어렵게 약재는 구할 수 있었지만, 그는 항상 제품이 나오는 순간까지 노심초사하며 긴장을 놓지 못했다. 경옥고 제조 가마 곁에는 언제나 그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꼬박 72시간 동안 중탕을 해야 완성되는 경옥고였기 때문에, 제조 기술자가 퇴근하면서 생긴 빈자리를 그가 밤을 새워 지켰던 것이다.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품질이 좋은 약을 만들어야 했으며, 정성만큼 훌륭한 기술은 없다는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품질로 인정받으며 착실하게 성장하던 사업에 위기가 닥쳤다. 타사에서 저질 약재를 사용한 경옥고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에는 한 회사에서 인삼 대신 도라지를 넣은 사건이 터졌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이로 인해 광동제약의 제품도 같은 취급을 받아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됐다.

▲ 청년시절의 최수부 회장(오른쪽에서 두번째)

“사장님, 가격을 낮춰야 됩니다. 다른 회사에서 헐값에 막 쏟아져 나오는데 누가 우리 제품을 사겠습니까?”
“지금으로선 도리 없어. 값을 내리면 질이 떨어지는 약재를 써야 하지 않나!”
그는 누가 뭐라고 하든 옳다고 믿는 자기 뜻을 한결같이 밀고 나갔다. 그로부터 약 6개월 후, 소비자들은 다시 ‘광동 경옥고’를 찾기 시작했다. 품질이 좋은 제품이 끝내 승리한다는 그의 믿음이 사실로 증명된 것이다.
실제로 최근까지도 항상 웅담‧사향‧우황 등 중요한 약재는 손수 골랐던 최수부 회장의 고집은 유명했다. 소비자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품질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고집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약재를 보고 있는 최수부 회장
한방 대중화의 첫 시도 ‘쌍화탕’ 개발
1973년 9월 13일, 광동제약사는 설립한 지 10년 만에 법인화하고 상호를 광동제약주식회사로 변경하였다. 이즈음 최수부 회장은 새로운 시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한방 대중화의 첫 성공이라고 불리는 ‘쌍화탕’의 생산이었다.
기존 제품들이 맥을 못 추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처음 쌍화탕 생산을 주장했을 때, 주위 반응들은 대부분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품질개선으로 모험을 걸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쌍화탕의 성공으로 한방약이 비로소 대중화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한방의약품은 원자재의 구매선택에서 제조, 유통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복잡하고 까다롭기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한약재는 등급이 천차만별이고 원산지에 따라 품질과 가격 등이 다르게 매겨지기 때문에, 양질의 약재를 찾아내는 것이 품질관리의 첫걸음이라고 볼 수 있다.
“약품은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일입니다. 한 치의 불성실이나 무책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최수부 회장은 제약회사를 이끌어 가면서 이를 항상 ‘소비자에 대한 정성’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것처럼 훌륭한 기술은 없다’는 신념의 끈을 놓지 않았다. 소비자들에게서 이끌어 낸 감동이 바로 광동제약 제품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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