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e Connoisseur


‘와인 코나소(Wine Connoisseur)’라는 말에는 ‘와인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 와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굳이 connoisseur라는 제목을 단 이유는 그 단어와 관련하여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잘 알고 지내는 네 가족과 함께 미국에 여름휴가를 다녀 온 적이 있는데, 그 때 우리 일행이 타고 온 유나이티드 항공의 비즈니스 클래스가 connoisseur였다. 퍼스트 클래스와 비즈니스 클래스에는 항공사 마다 고유한 이름이 있는데, 마침 유나이티드 항공의 비즈니스 클래스 이름이 connoisseur 였던 것이다.

항공사들은 이들 두 클래스의 격(格)을 높이기 위해 이처럼 특별한 이름을 붙이는 것 외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와인 서비스이다. 어떤 와인을 서비스하느냐에 따라 항공사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에 항공사마다 와인 선정에서부터 세심하게 공을 들인다. 클래스에 따라 와인의 등급이 다르긴 하지만, 보통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 각각 2~3 종류를 테이스팅 한 후 승객이 원하는 와인을 제공한다.

우리 일행도 와인 서비스를 받게 되었는데 마침 여행을 함께 했던 분들이 다들 와인을 좋아해 이것 저것을 맛보고, 마음에 드는 와인이 있으면 더 시키기도 하면서 와인을 즐겼다. 동양인으로 보이는 여승무원도 우리 일행이 와인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느꼈는지, 와인을 기쁘게 서브했다.

그러던 중에 나는 그 여승무원에게 “퍼스트 클래스에서 제공되는 와인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데, 와인 리스트를 볼 수 없느냐”고 물었다. 여승무원이 보여 준 와인 리스트를 살펴보니 역시 격이 높은 와인들이었다. 그리고 나서 잠시 후 그 여승무원이 퍼스트 클래스에서만 제공되는 와인을 한 잔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닌가. 나를 위해 특별히 배려를 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거의 도착해 비행기가 착륙준비를 할 무렵, 그 여승무원이 테이블 냅킨(세르비에테)에 무언가를 하나 싸가지고 와서는 나에게 건네며 “당신들이 와인에 대해 많이 알고 또 즐기는 것을 보면서 와인을 선사하고 싶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안에는 퍼스트 클래스에서 제공되는 귀한 와인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고마워 국적을 물어보니 일본인이라고 하였다. 만일 서양인이라면 룰을 어기면서까지 그런 배려를 했을까 생각하니, 새삼 ‘동양인의 정(情)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 여승무원이 나를 와인 코나소(Wine Connoisseur)로 평가해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 일이 있기 며칠 전 여름휴가를 보낸 미국에서도 와인과 관련하여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 마침 휴가지에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 일행이 동양인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웨이터의 서비스가 그리 친절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좋은 와인을 시킨 후에, 와인을 서브하는 과정에서 그 웨이터에게 이런 저런 주문을 하자 그 사람의 태도가 바뀌었다. 내가 와인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웨이터가 알아차리고는 바로 ‘Yes, Sir’라는 호칭을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와인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대접이 달라지는구나’ 하고 새삼 느꼈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이나 고위 관료가 유럽을 방문했을 때, 그 쪽 사람들이 Age wine을 선물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는 이것을 그리 대수롭지 않은 선물로 생각했다고 한다. 방문국의 국가원수나 고위회담 책임자의 나이가 적어도 50~60세가 넘는다고 볼 때 적어도 50~60년 된 오래된 와인을 선물한 것인데, 이것은 값도 값이려니와 보통 샤또(Chateau)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 구하기 힘든 귀한 와인이다.

Age wine은 쉽게 말해 ‘자기 나이와 같은 와인’이다.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는 유럽의 가정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해에 생산된 값이 합리적이고 괜찮은 와인을 수 백병 구입하여 보관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와인의 생산연도를 가리키는 빈티지(vintage)가 그 아이의 나이가 되는 일종의 Age wine이 되는 것이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오동 나무를 심어 내 나무가 되고 결혼할 때 그 나무로 장롱을 만든 다는 것처럼.


Age wine은 보통 10년이 지나고 나서부터 그 아이의 생일날 1~2병 정도를 따서 마시게 되는데, 일정 연령이 되면 아이도 함께 자신의 age wine을 마신다. 그러다가 그 아이가 자라 결혼을 하게 되면 비로소 결혼식에서 20~30년 된 귀한 age wine을 내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때는 한꺼번에 많은 와인이 소요되지만, 유럽에서는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들만을 초대해 결혼식을 치르기 때문에 보관하고 있던 age wine이 모두 동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결혼을 해서 분가를 하게 되면 그 아이가 보관하고 있던 와인들을 가지고 나가게 한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 가운데는 환갑이 되었을 때 자기가 태어난 연도의 age wine을 갖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물론 예순이 넘어서는 마시기 보다는 가지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즐거움을 느낀다. 이런 이유로 유럽에서는 50~60년 된 age wine을 선물 받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런데 한번은 우리나라에서 어떤 부유한 사람이 작년(2004년)아들 결혼식에age wine을 내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아들 나이에 맞춰 1974년산 와인을 내놨다고 하는데, 아마도 30년 동안 보관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결혼식에 맞춰 구입한 와인이었을 것이다.

귀한 손님들에게 귀한 와인을 대접하고 싶은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는 결혼식에 많은 하객들이 참석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30년 된 고급 와인을 내놓았으니 어울리지 않는 경우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와인도 그 와인이 놓여져야 할 자리가 있다. 아마 대부분의 하객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진 와인이 그렇게 귀한 것인 줄도 모르고, 꿀꺽 꿀꺽 마시거나 아니면 보통 결혼식에서도 그렇듯이 많은 분들이 그냥 잔에 담긴 채 남겨 놓았을 것이다. 돈도 많이 들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폐수처리에도 돈이 얼마나 더 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와인을 선택하고 마시는 것 모두가 문화(文化)라 할 수 있다. 행사의 성격, 음식의 종류, 그리고 분위기에 따라 어떤 와인을 마시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다. 와인을 공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와인의 미덕(美德)을 한 가지 들자면, 적당한 양의 와인은 우리의 건강을 지키고 잔병을 다스릴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도 와인에 물과 향료를 섞어 병을 치료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경에도 보면 “Stop drinking only water, and use a little wine because of your stomach and your frequent illnesses”(디모데전서 5:23)라는 말씀이 나온다. 술 취하는 것을 경계하는 성경 말씀이 많지만 적당히 - 체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1~3잔 정도 - 마시는 와인은 분명 건강에 도움이 된다.

인생을 살다 보면 그냥 보내기 아쉬운 날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날에는 소중한 사람과 함께 꽃과 촛불이 준비된 식탁에서 와인을 마셔보기를 권하고 싶다. 삶의 여유와 멋은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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