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는 보물 제142호 동묘(東廟)는 사대(事大)의 상징이었던 동묘 앞에 지금은 구제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

서울 지하철 동묘앞역에서 동묘로 가는 길은 판타지에 빠질 수밖에 없는 몽상의 입구다. 판타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머뭇거림’이 있어야 한다. 뭔가 찾는 듯한 노인들, 소주병과 함께 뒹굴고 있는 노숙인, 싸구려 노점상이 즐비하다.

동묘 정문은 큰길을 등지고 남쪽으로 나있어 길로 꺾어 들어가야 한다. 온통 시골 장터 같은 벼룩시장을 이루고 어수선하다.

판타지의 공간으로 들어선 듯한 길목을 지나면 ‘동묘공원’이라고 새긴 큰 표지석이 보인다. 이곳이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동묘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 123-1번지, 광제묘(關帝廟)라고도 한다. 성인군자 같은 유비(劉備), 전략의 귀재 제갈량(諸葛亮), 괴기스러운 조조(曹操)와 달리 관우는 신장 9척, 수염길이 2척에 긴 일월도에 적토마를 탄 사내였다.

동묘에 들어가면 낯선 분위기에 잠시 발을 멈추게 된다. 정면 5간, 측면 4간의 정자형(丁字形) 건물이 있고 검은 벽돌로 두껍게 쌓아올렸다. 정면을 제외하고는 온통 벽돌벽으로 둘러싸인 중국풍이다. 서울이 아니라 잠깐 베이징(北京) 어드메쯤 온 듯한 환상에 빠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가령 울산성에서 왜장 카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와 싸울 때 관우의 영령이 출현하여 포위망을 뚫어주고 승리하게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명 황제 신종(神宗)이 알고, 동대문 밖에 ‘동묘’가 들어선 것을 그 이듬해의 일이고, 공사가 완공된 것은 선조 34년(1601년)이었다.

동묘는 중국 건축양식에 영향을 받아 건물 옆면과 뒷면의 벽을 벽돌로 쌓았다. 동묘에 있는 관우상은 임진왜란 후 명나라 황제가 직접 금을 보내 1602년(선조35년) 만들어졌다. 본전 내부에는 약 25m 크기의 금동관우상이 있으며 유비와 장비의 목조상도 있다.

5연은 관우의 입상 주변에 감도는 “고요히 잠드는 얼”을 회감시키고 있다. 6연에는 벽판을 천정이나 벽을 바르는 데 쓰는 널빤지를 말한다.

조선 후기 숙종이 처음 동묘에 들러 예를 표한 뒤 영조가 방문해 어필을 남겼고 고종이 직접 쓴 현판이 걸렸다. 백련은 흰 빛깔의 연꽃이다.

임진왜란 후 느닷없이 들어선 관왕서당은 정치적으로 대국(大國)의 정신문화가 다시 우리 문화를 압도하는 상징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관왕’, 곧 대국의 위상은 조선땅과 시인의 무의식에 깊이 뿌리내렸다. 무당로에 어김없이 관우의 형상이 등장하는 것도 대국의 무의식에 짓눌려 있는 무의식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지하철 1호선과 6호선이 만나는 동묘앞역 동묘 벼룩시장, 지하철역에서부터 쏟아져 나온 ‘사람 파도’에 밀려, 떠밀려 가는지 모르게 길이 붐빈다. 길가 곳곳엔 옷더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묘 주변 공터에 자리 잡은 노점 상인들은 사람 크기보다 큰 봉투에서 옷을 땅바닥에 쏟아 붓는다. 의자에 올라 손뼉을 치면서 목소리를 높인다. “골라 골라!” “이천원 이천원!”

봉투 속 종이처럼 구겨진 옷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나오는 순간 아줌마 아저씨들 공중제비 재빨리 낚아챈다. 보물 찾는 자세. 무릎 꿇거나, 허리 굽히거나, 무릎을 굽히며 보물찾기 여념없다.

인간두더지! 옷색깔, 사이즈, 스타일 스캐닝 끝나야 파고든다. 그래 인간두더지가 맞는다.

“아이고 이 언니야, 2000원에 뭘 더 바라! 한번 잘 입고 외출하고 돌아오면 되는 게 아냐. 거기 잘 찾아봐. 보물이야. 찾는 게 임자 아닌가?”

“옷 무덤에서 심봤다!” 몸을 파묻을 정도로 깊숙이 헤쳐 티샤스 건졌다. 제품 라벨, 소재, 단추, 지퍼 살펴보니 손도 안댄 새 제품이네! 인터넷에서 ‘동묘 벼룩시장’, ‘동묘 구제시장’ 검색하면 ‘동묘 득템’이란 용어가 나온다.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을 살 수 있는 곳 동묘벼룩시장은 ‘쉬운 쇼핑’ 할 수 있다는 소문도 자자하다.

동묘 벼룩시장은 생각보다 노점이 많고 넓다. 백화점은 백 바퀴 돌아야 한다 해서 백화점이라더니 구제시장은 구백 번은 돌아다녀야 하는가 보다. 하기야 ‘벼룩시장’이라는 말뜻이 벼룩이 들끓을 정도로 오래된 물건을 판다는 뜻이라 하니 값싸게 사는 만큼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면서 15년 넘게 노점상 했다는 상인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보자.

“옷장에 처박아 두면 그게 옷인가? 제대로 입어줘야 옷이지, 그런 것들이 이곳에 와서 제 주인을 만나면 생명을 얻는 것이지. 죽어가는 옷에 심폐소생술 해주는 거야.”

동묘시장은 1980년대부터 형성됐다. 이후 청계천 개발로 인근 황학동 벼룩시장 상인들이 동묘로 넘어오면서 구제의류부터 외제과자, 시계, 고서(古書), 레코드판 등 말 그대로 ‘없는 게 없는’ 시장이 되었다.

‘6090의 홍대’라 불리며 근처 종로 등지에서 온 어르신들의 아지트로 사랑받았다. 최근에는 연령대가 대폭 확대되어 10대 학생까지 눈에 띨 정도라 한다. 매스메디아의 영향으로 주말에는 10만 명이 찾아온다고 하니 즐거운 일이다. TV에 한번 나오고 난 뒤에는 동네가 주는 빈티지 느낌에 ‘출사족’이 사랑하는 곳이 되었다.

종묘시장은 평일 250~300개, 주말 550~600개 정도의 좌판이 모여 있다고 말하지만, 체감은 몇 배는 되는 듯싶다. 앉을 수 있는 곳은 죄다 노점이 펼쳐져 있다. 간혹 가격표 안 뗀 제품을 만나면 홍제다. ‘싸다고 무턱대고 사지 말라’ 상인들 말이다.

동묘시장은 ‘싼 가격’으로도 인기 높지만, 유명브랜드 구제시장으로 유명해졌다. 명품브랜드가 간혹 눈에 띄지만 무턱대고 달려들어서면 후회한다. 동묘시장 조합원들은 ‘짝퉁 판매금지’를 내세우고 있다.

골동품 거래도 성행하고 있다. 1920년대 재봉틀, 희귀레코드 등 골동품도 천국이다. ‘수집가’를 겨냥한 상품도 눈에 띈다. 지포라이터, 옛날 동전, 사진기, PSP게임기 등도 팔린다. 집에 필요한 물건은 다 있어 보였다. TV, 옛날 휴대폰, 아이폰, 각종 공구 파는 곳도 있다. 값비싼 자개상, 구리 주석 동상 등 값비싼 물건은 팔아주고, 수수료를 받기도 한다.

친절하게도 벼룩시장 쇼핑Tip을 알려준다. 물건이 많으면 캐리어나 배낭을 들고 나간다. 발품 생각하면 운동화나 굽 낮은 신발도 필수다. 마스크와 물수건을 상비해야 한다. 얼룩 같은 건 쉽게 빠지겠지 생각하다간 세탁비나 드라이 비용이 옷값의 몇 갑절 될 수 있다.

동묘 앞 음식값은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고들 말한다. 거리 포장마차에서는 부침개 1500원, 토스트 1000원에 판다. 노점상은 물론 식당도 마찬가지다. 구수한 멸치국물에 뜨끈하게 말아주는 국수 한 그릇은 3000원이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빈대떡은 6000원이다.

1호선 동묘역에서 동대문역으로 이어지는 큰 길 북쪽 편으로 200~300m 거리에 인도, 네팔 음식점과 식료품점 10여 개가 밀집해 있다.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네팔인들이 봉제산업 쇠락 후 네팔인들도 흩어졌다. 주말이면 많은 네팔인들이 고향 음식을 먹으며 향수를 달래고 필요 물품을 사간다.

메뉴판에는 ‘탄투르 숯불을 밑바닥에 놓은 원통형 인도 토제 화덕’ 티카 고기나 채소를 양념에 절여 두었다가 익힌 요리 등 요리법과 식재료 설명이 자세하다.

멸치와 국수 이야기. 국수 얻어먹는 방법과 순서를 곳곳에 붙여 놓았다.
1) 선불 3000원 2) 쟁반에 김치, 젓가락 놓기 3) 줄을 서시오
4) 받으시고 가서 드시면 됩니다 5) 빈 그릇은 정수기 옆 선반에 반납해 주세요

고바우에선 마블링, 한우 꽃등심, 제비추리, 토시살, 차돌박이 - 착한가격이란다.
국내산 삼겹살, 갈매기살, 항정살 등 부위별 판매도 성하다.
할아버지 손칼국수집에선 직접 밀어낸 면발 쫄깃쫄깃 손칼국수 아닌가.
순희네 빈대떡은 바삭바삭, 빈대떡 장시장보다 나은 게 특징이다.
동묘 벼룩시장에서 영동교를 지나 청계천을 건너면 곱창집 20여 곳이 양 옆으로 늘어서 있다. 돼지곱창과 막창을 저렴하게 낸다. 손가네 닭한마리는 동대문보다 통통한 닭, 살은 더 부드럽다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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