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여행을 꿈꾼다면 도심 속에 위치한 홍릉수목원으로 가보라 한다. 국립산림과학원의 부속전문 수목원으로 규모가 작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숲은 13개 구역, 20만여 그루가 넘는 식물이 초록으로 물들인다.

홍릉수목원에는 홍릉이 없다. 홍릉의 주인은 고종황제의 비였던 명성화후다. 홍릉이 남양주로 이장된 후 1922년 홍릉일대에 임업시험장이 조성되면서 한국의 첫 번째 수목원이 탄생했다. 현재 홍릉수목원은 평일에는 국립산림과학원의 시험림으로, 주말에는 일반인들이 산책을 즐기는 숲으로 활용되고 있다.

홍릉수목원을 즐기는 데에 정답은 없으니 천천히 식물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걷는 것이 좋다. 입구에서 가까운 제1수목원과 제2수목원에는 키가 훤칠한 침엽수들이 식재되어 나무향이 진하게 전해져 온다. 전나무, 비자나무, 연필향나무 등 비슷해 보여도 사실은 모두 다른 나무들이란 것을 알고 나면 숲에서 노니는 재미가 배가 된다.

이곳의 깊은 역사 덕분에 숲은 일부러 식재했단 느낌보다 자연스레 어우러졌단 느낌이 더 강하다. 야트막한 오솔길을 따라 여기저기 숲 속을 마실 다녀도 좋고 수목원 안의 산림과학관에서 산림과 생활에 관련한 주제로 전시물들을 살펴봐도 알차다. 봄부터 가을까지만 전행되는 숲 해설을 들어보자. 홍릉수목원을 돌아보면서 홍릉 옛터에는 홍릉의 내력을 읽을 수 있다. 수목원에는 홍릉터의 유래를 적은 표지판만 남아 있다.

이곳 홍릉(洪陵)은 조선조 말기 제26대 고종황제(이재황 1852~1919,재위 44년)의 왕비 명성황후(明成皇后:본관 여흥,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께서 묻혔던 곳이다. 명성황후 민씨는 1851년 여주에서 태어나 16세때 왕비에 간택된 후 시아버지인 흥성대원군 반대파를 규합하여 민씨정권을 세우고 개국정책을 주도하는 등 왕실정치에 관여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대원군의 친청?친일 정책 등에 반대하고 정치의 실권을 잡기 위하여 정쟁을 벌이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충주, 장호원 등으로 피신 중 청나라의 도움으로 대원군을 밀어내고 민씨정권을 재수립하였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으로 민씨일파가 실각되자 명성황후는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정권을 무너뜨렸으나 친일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대원군의 재등장으로 갑오경장이 시작되자 러시아와 결탁하여 일본세력의 추방을 기도하다가 1895년 8월 20일(음) 새벽 일본공사 미우리고로(삼포오루·三捕梧樓)가 보낸 자객에 의하여 경복궁 곤령각에서 난자 시해당한 후 시체가 궁궐 밖 뒷산으로 운반되어 거적에 말려 석유가 부어져 소각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명성황후는 일제의 사주로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되었다가 복호(復號)되었고 1897년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 해 11월 국장을 치른 후 이곳에 묻혀 22년간 홍릉이라 불리어 관리되어 오다가 1919년 1월 21일 고종께서 승하하시자 2월 16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현 홍유릉)으로 천장(遷葬), 고종과 합장(合葬)하게 되니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어 현재까지도 이곳을 홍릉이라고 부르고 있다.

명성황후 생가는 명성황후가 태어나 8세까지 살던 집으로 조선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직계 후손인 명성황후의 아버지께서 조상의 묘를 지키기 위해 묘막으로 건립한 곳이다. 지금도 생가 위쪽 산책로를 오르면 미유충의 묘를 볼 수 있다. 명성황후가 태어난 안채로 발걸음을 옮기면 강직한 인상이 돋보이는 명성황후의 진영이 보인다.

한 나라의 국모로써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역사를 떠올려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명성황후 생가와 나란히 서 있는 감고당은 숙종이 인현왕후의 친정을 위하여 지은 집으로 감고당이라는 이름은 영조가 효성이 지극한 인현왕후를 기려 지어준 이름이다. 인형왕후가 폐위된 5년 동안 거처한 곳이기도 하고 명성왕후가 생가를 떠나 왕비로 간택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본래 안국동에 있던 것을 명성왕후의 고향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감고당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랑채는 목제와 유리가 잘 조화되어 멋스러울 뿐 아니라 햇볕이 내리쬘 때면 따뜻함이 한껏 느껴진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영정은 물론 시해와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된 명성후기기념관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 이곳을 거닐고 있자면 한나라의 국모로써 비운의 삶을 사신 명성황후의 숨결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하다.

명성황후 생가에 들어서면 입구에 놓인 자동 안내버튼을 눌러보자. 명성황후의 어린 시절과 집안 곳곳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들을 수 있어 돌아보기 전 많은 도움이 된다. 매년 11월 17일 명성황후 탄신일에는 명성황후 승모제가 열린다. 명성황후 생가 위쪽으로 황학산수목원까지 연결되는 산책로가 있다. 날이 좋은 날은 삼림욕을 하며 걸어볼만하다.

경기도 유현문화재 제46호. 건평 30여평의 목조와즙(木造瓦葺). 이 건물은 본래 숙종의 장인인 민유증(閔維重)의 묘막으로 1688년(숙종13년)에 처음 숙조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의 증수를 거쳐 현재는 목조와가 14칸 맛배지붕 1동과 부속건물 1동만이 남아 있다. 우물마루 대청 “ㄱ”자형 건물 합각(合閣)지붕에 훗치마인데, 전면은 정면 930㎝와 측면700㎝이고 후면은 정면 1320㎝내 측면 1200㎝이다. 동쪽 측면은 500㎝에 남측은 390㎝로 정확한 건평은 28.3평이다. 큰방 3칸반, 작은방 1칸반.

1904년 광무 8년건립된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 - 고종의 어필비(御筆碑)

명성황후(1851~1895)는 조선 제 26대 고종황제의 비로 뛰어난 외교력으로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정책을 추진했던 인물, 1895년 양력 10월 8일 새벽 을미사변으로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 당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 비운의 국모. 그 명성황후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던 집이다. 묘막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 남아있는 것은 안채뿐이었으나, 1995년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보원됨으로써 면모가. 일신되었다.

황학산수목원은 여주군에서 운영하는 공립수목원이다. 작년 산림박물관까지 개관하면서 어린이들의 소풍 및 가족과 연인들의 주말 나들이 장소로 인기가 높다. 향기 나는 식물이 있는 물향기 정원, 우리 식물이 식재되어 있는 강돌정원, 연인과 가족이 즐기기 좋은 미로원을 돌아보면 몸이 건강해지는 기분이 된다. 명성황후 생가와 차량으로 10분 거리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국내외 유명 브랜드들이 모여 있는 여주 프리미엄아울렛에서는 평소 갖고 싶었던 명품을 욕심내 볼만하다. 고가의 브랜드 뿐 아니라 스포츠의류와 주방용품등 원하는 모든 제품을 시중 가격보다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이국적인 벽돌건물과 분수,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까지 갖추고 있다.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홍류릉은 조선 26대 고종부부와 27대 순종부부가 잠들어 있는 황제릉이다. 대한제국 선포에 따라 고종이 황제가 됨으로써 능역조성도 명나라 태조 효릉의 모제를 따라 기존 왕릉과 다르게 구조물이 대폭 증설되었다. 기존 왕릉의 정자각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일자형 침전을 세웠고, 양, 호랑이 석조물 대신 홍살문에서 침전까지 참도의 좌우에 나란히 말 2쌍, 낙타 1쌍, 해치, 사자, 코끼리, 기린의 순으로 석수를 세웠다. 각 석수를 보며 동물의 종류를 맞춰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유릉은 조선왕조의 동릉삼실(同陵三室)능이다. 순종의 계비였던 순정효황후 윤씨가 1966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승하하면서 유릉에 합장되었다. 윤씨는 1910년 이완용이 한일합방의 조인서에 옥쇄의 날인을 시도하자 옥쇄를 치마 속에 감추고 버티다가 강제로 빼앗겼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홍유릉 안에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과 황태자비 이방자의 묘역인 영원과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의 묘소도 함께 있다.

매년 5월에는 홍유릉 문화제가 열린다. 일본 자객에 의해 암살된 비운의 국모 명성황후 국장 재연 및 노제외에도 다양한 행사가 이어진다. 약 2시간 동안 진행되는 명성황후 국장과 노제는 명성황후국장 도감의 궤를 근거로 재현된다. 행렬 앞뒤로 따르는 일본군인을 보며 다시 한번 역사의 중요함을 되새겨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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