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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기행 : 영릉(寧陵)
서울 성북구 이정균내과의원 이정균
2016년 12월 01일 (목) 17:16:26 김은희 기자 news@medworld.co.kr

조선 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崇慕)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 조선은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다. 그리하여 42기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되었다. 조선 왕릉은 우리의 전통 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王)과 왕비(王妃)의 무덤을 말하며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하고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인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조선 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다.

조선 왕릉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 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광복 후에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능기신제(陵忌辰祭·기일에 올리는 제사)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숙하게 행해진다.

조선 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이 있는 성(聖)의 공간을 ‘능침공간’으로 부른다.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을 ‘제향공간’으로 부르고,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은 ‘진입공간’이라 부른다. 조선 왕릉에는 각 공간적 성격에 부합하는 건축물과 조형물이 왕릉의 전체적 조경과 조화를 이루며 조성되어 있다.

조선 왕릉 주요 상설(常設)에는 능을 관람할 때 제 앞에 있는 건물이 재실(齋室)이다. 능 제사와 관련한 제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하였다. 진입공간엔 금천교(禁川橋)가 있어 왕릉의 금천(禁川)을 건너는 다리로서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을 한다.

홍살문(紅箭門)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이다.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아 놓았다. 홍문(紅門) 또는 홍전문(紅前門)이라고도 한다.

홍살문에서 정자각(丁字閣)까지 이어진 길을 참도(參道)라 부르고 박석을 깔아 놓았으며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신도(神道)라고 하며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도(御道)라고 한다. 비석이나 신도비를 세워둔 곳은 비각(碑閣)이다. 신도비(神道碑)는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을 가리킨다. 정자각(丁字閣)은 능제향을 올리는 정(丁)자 모양으로 지은 집이다. 제향을 올릴 때 왕의 신주를 이곳에 모신다.

무인석(武人石)은 문인석 아래에서 왕을 호위하고 있으며, 두 손으로 장검을 집고 위엄 있는 자세로 서있다. 문인석(文人石)은 장명 등 좌우에 있으며 두 손으로 홀을 쥐고 있다. 능침(陵寢)은 능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능상(陵上)이라고도 부른다. 곡장(曲墻)은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분의 동,서,북 삼면에 둘러놓은 담장이다.

왕릉이 자리 잡은 자리, 택지로서 가장 좋은 지형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이다. 산을 등지고 앞쪽은 물이 흐르는 지형을 말함이다. 왕릉의 조건 중 풍수지리상 명당 외에 단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왕이 있는 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야 한다. 후손인 왕이 능에 참배를 해야 하는데 그 행차가 복잡해 너무 멀리는 갈 수 없었고 무슨 변고라도 생기면 빨리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형조형이 조성되면 지형을 둘러보며 왕릉에 들어간다.

왕릉 입구에는 한옥건물 재실(齋室)이 있다. 왕릉관리를 담당하던 능참봉이 살던 곳이다.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 혹은 제사의 높임말 제향을 주관하던 능참봉이 살던 곳이다. 제관들의 휴식처이며, 제향에 쓰일 기물들을 간수하고 왕릉에서 제향을 맡아보는 관리, 수복(守僕)이 거처한 곳이기도 하다. 요금 관리사무소로 쓰고 있는 것도 재실의 제 기능을 하고 있다.

영릉(寧陵)은 제17대 임금 효종(孝宗:1619-1659)과 인선왕후(仁宣王后:1618-1674) 장 씨의 능이다. 효종의 영릉은 세종의 영릉(英陵)에서 약 700m 떨어진 곳에 있다.

영릉(英陵)에서 잠깐 걸어서도 닿을 수 있는 곳에 있고, 입장료를 따로 내지 않아도 되는데도 세종의 영릉에 왔던 관광객들 중에는 효종릉을 모른 척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번잡하고 사람들의 손으로 너무 많이 훼손된 세종의 영릉을 보고 온 탓도 있지만 실제로 효종의 영롱은 깔끔하고 단아해 보인다.

효종은 인조와 인열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인조반정 후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병자호란에 조선이 패한 후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를 잡혀가 8년간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청나라에서 이들 왕자들은 명나라를 공격하는 군대에 징발되어 여러 전선으로 끌려 다니며 온갖 고생을 하였다. 이 때 봉림대군은 형 소현세자를 적극 보호했다. 이런 고난의 과정에서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게 되었다.

1645년 먼저 환국한 소현세자는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봉림대군도 귀국하여 세자에 책봉된다. 소현세자의 별세 후 인조는 청나라를 대하는 입장차이가 컸다. 소현세자에겐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봉림대군은 왕위에 오를 상황은 아니었지만 인조는 소현세자 주변인물을 모두 제거하고 차남 봉림대군을 왕위에 올렸다.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도 죽음을 당했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도 제주도에 유배됐다가 죽었다. 이 이야기는 TV 드라마 ‘추노’의 한 축으로 극을 이끌어 가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효종은 즉위직후부터 친청세력을 몰아내고 척화론자 송시열, 김상헌을 중용하여 강력한 북벌계획을 수립한다.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 강화,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작업을 시작했다. 영의정에서 파직당한 후 원한을 품고 있던 김자점이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한다. 결국 조선은 적극적인 북벌계획을 실천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효종은 군사를 증강하고 한양 외곽 방비보강, 북벌 선봉 어영청 부대의 대폭 개편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박연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임진, 병자 양란을 겪은 후여서 국력이 쇠진한 상태였고, 빈약한 재정, 곤궁에 빠진 민생에 북방에서는 청나라의 국세가 점차 강대해지면서 조선의 북벌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효종은 국방강화와 함께 경제적 안정, 사회 혼란을 바로잡기위한 각종 시책과 다양한 노력을 경주했다. 대동법의 실시 확대, 토지세 조정은 백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한 정책이었다. 효종은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시고 1659년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선왕후는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로 태어났다.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린 후 8년간 선양에서 살았다. 인선왕후는 조선 왕비 중 외국에 나가 본 유일한 왕비가 되었다. 선양에서 돌아와 세자빈이 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진봉되었다.

효종이 별세하자 동구릉내 건원릉(태조묘) 서쪽 산줄기, 지금의 원릉(21대 임금 영조(英祖)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릉)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1673년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우려가 있다며 능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영릉 자리로 옮기기로 하고 열었는데 광중에 물이 차기는커녕 흙은 보송보송하기만 했다. 그러나 한 번 개장한 능을 다시 덮을 수는 없어 영릉은 천장을 하고 이에 연루된 사람들은 면직을 당했다.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에 같이 있는 쌍릉이다. 두 봉분이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라 왕릉은 위쪽에 왕비릉은 아래쪽에 있다. 이런 배치를 동원상하봉릉이라 한다.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왕성한 정혈을 비켜가야 하기 때문에 정형이 흘러내리는 상하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다고 전해온다.

왕릉의 봉분 뒤에 곡장이 설치되어 있지만 왕비릉에는 곡장이 없어 두 능이 한 능역에 있음을 말해준다. 두 능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세웠고, 난간석 기둥에 방위를 표시하는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사초지 위에는 한 쌍씩의 망주석과 문무석인, 두 쌍씩의 석양, 석호, 석마가 서 있고 혼유석, 장명등석이 하나씩 놓여있다. 곡장이 없는 것을 빼고는 왕비릉도 왕릉과 다를 바 없다.

영릉에는 특이한 점이 더 있다. 보통 홍살문 밖에 있는 금천교가 홍살문 안에 있다. 물길이 정자각과 가까이 흐르는데 그 자연물을 거스르지 않고 능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또 동계도 신도와 어도로 이어진 계단 두 개만 있어야 하는데 계단이 세 개다. 계단이 하나 더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영릉은 사초지 위에까지 올라가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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