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정통 가계 이씨 왕가의 신주를 모신 곳 종묘.
종묘를 둘러싼 담장을 따라 형성된 길이 순라길이다.

순라(巡邏)는 조선시대 도둑과 화재를 막기 위해 돌던 야간 순찰을 뜻한다. 당시 순라군들은 밤 10시경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종묘와 궁중 도성 둘레를 순찰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이곳이 순라길이라 불리는 이유는 동쪽 궁궐인 창덕궁 순찰을 담당했던 좌순청(左巡廳)이 지금의 종로3가역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하철 1?3?5호선 종로3가역 11번 출구로 나가 동대문 방향으로 150m를 걸으면 서순라길을 만날 수 있다. 개편된 주소체계에 따르면 순라길은 종묘를 기준으로 동순라길과 서순라길로 나뉜다.

동순라길은 종묘공원 입구에서 원남동 우체국까지 600m거리다. 주차장과 빌딩을 지나면 작은 동네길이 나타난다. 자동차 한대 지나다닐 정도의 좁은 길 왼쪽으로는 종묘 담장이 높은 옹벽 위에 있다.

종묘가 북악산 응봉줄기의 끝자락 서쪽 경사면에 있기 때문에 담장이 높은 곳에 있는 것이다. 도보여행객들이 선호하는 길이 서순라길이다.

서순라길은 종묘공원 입구에서 창덕궁 앞길인 율곡로까지 약 800m거리이다. 율곡로에서는 돈화문 건너편에서 원남동 사거리 방향으로 가다 종묘 돌담길에서 접어들면 된다. 종묘 앞에 있는 종묘공원 입구에서 귀금속 상가를 지나 돌담길 초입에 들어서면 종로 돌담의 고풍스러운 길이 시작된다.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가로수가 3~4m 간격으로 열을 맞춰 서있고 주택가 쪽으로 이발소와 작은 성당, 보석 세공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길가 탁자에 둘러앉은 노인들이 이야기 나누는 풍경은 마치 한적한 소도시 모습이다.

길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예스러운 분위기가 더해진다. 종묘 돌담 너머로는 100년 된 갈참나무들이 검은색 담장 기와를 넘어와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팔각 가로등과 돌 의자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허름한 구멍가게, 과학사, 상패(賞牌)사, 수리점이 있는 길 풍경은 80년대 동네 입구 모습과 비슷하다.

깨끗하게 잘 정비된 길과 돌담 위로 높이 솟은 참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늘, 아직 자본의 욕망이 덜 침투한 듯한 동네 모습이 오가는 이들에게 한적함과 어우러져 도시 여행의 색다른 맛을 준다.

이 길의 2/3지점 쯤에는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 나오면서 유명해진 홍어요리 전문점 ‘순라길’도 있다. 길 끝자락에는 공방과 갤러리가 드문드문 자리 잡았고, 오른쪽으로 쌈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순라길은 시대에 따라 이용하는 사람이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내시들이, 일제강점기에는 순사들이 지나다녔다. 해방 후에는 봇짐과 나무를 진 행상들이 드나들었다.

순라길은 한때 자취를 감출뻔한 적이 있었다. 1950년대 후반 극심한 가난으로 이곳에 좀도둑이 들끓자 정부에서 막아버렸기 때문에 그 사이 사람들은 돌담 앞까지 집을 늘려 나갔다.

1973년 이곳에 살아온 윤장강(71) 할머니는 ‘처음 이사왔을 때는 돌담과 벽 사이 거리가 채 1m가 되지 않았다며 돌담을 도배해서 벽처럼 쓰거나, 장독대를 올려놓는 뒷마당으로 썼다’고 말했다. 때문에 서순라길의 서쪽길인 지금의 율곡로 10길이 집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한다.

40여 년 간 이름만 전해지던 순라길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찾은 건 도로개발공사를 시작한 1995년 종묘 돌담에서 주택가로 이어지는 작은 언덕 위 불법점유물을 헐어내고 언덕은 깎아내 도로를 만들었다. 이 도로에 보도블록을 깐 인도와 1차선 일방통행로를 설치하였다. 1997년 순라길이 역사문화 탐방로로 지정되면서 돌담이 복원되었다.

서순라길 주변에는 봉익동(鳳翼洞)과 권농동(勸農洞)이 있다. 두 동네 모두 이곳에 많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내시들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봉익은 ‘봉황의 날개’라는 말로 높은 곳에 붙어 세도를 누리는 내시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권농동에는 궁중에서 필요한 채소를 기르는 내농포(內農圃)가 있었다. 이곳 관리를 궁중의 내시가 맡았다.

현재 순라길 종로 쪽 입구 주변에는 귀금속 상가들이 밀집해 있다. 1970년대 중반 순라길 건너 종로4가 쪽 예지동 귀금속 상가가 포화상태가 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종로 3가 일대에는 약 3,500개 가까운 귀금속 상점이 있다.

고풍스럽고 서민적인 순라길 탐방의 덤으로 귀금속 구경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조선의 밤 지킨 순라군 따라 옛길 정취 즐기기
서울 종로에 있는 순라길은 종묘를 둘러싼 골목이다. 종로구에서 역사 탐방길로 지정.
종묘를 가운데 두고 왼쪽(권농동에서 봉익동)이 서순라길, 오른쪽(원남동에서 인의동)이 동순라길.
서순라길 : 종묘공원 입구-담장따라 덕수궁 후원까지 1.5km거리
동순라길 : 주택가를 낀 작은 골목길이다.

조선시대 이 길에는 순라군들이 야간에 육모 방망이를 들고 화재나 도적을 경게하기 위해 순찰을 돌았다. 과거에는 폭 2m를 넘지 못하는 흙길이었지만 지금은 차가 다닐 정도로 넓다.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은 종묘공원 안에 있다.

장기, 바둑 두는 노인들
1주일에 서너번 서울 일 보러올 때 들른다는 탑골공원은 단속이 심하여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친구를 사귀기 위해 찾아온다고 한다. 선술집에 막걸리 한 잔 마시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탐방객도 있다.
순라(巡邏)는 조선시대 야간순찰을 뜻하고 군중, 도성 순찰하던 군대는 순라군으로 불렀다. 초경(오후 7~9시)에 시작하여 5경(오전3~5시)까지 순찰을 돌았다. 인근에 순라청을 두고 있었다.
지금의 순라길은 종묘(세계문화유산)와 창덕궁을 잇는 길이다.
이름처럼 화려하지는 않다.
볼거리 많지 않다.
가로수와 돌담 길따라 걸음을 옮기면 운치가 있는 길이다.
종묘:조선 역대 왕들의 위패 모심, 제를 올린다.
1995년 세계문화유산(유네스코)으로 지정되었다.
종묘엔 정전
별모-영녕전, 전사청
어숙실, 향대청, 신당 등 건물이 들어서 있다.
종묘대제를 지내는데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국가적 행사였다.
정전 외관은 멋스럽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흥준 교수는 묵직이 내려앉은 맞배지붕이 수직의 상승감을 지그시 눌러주며 절제와 경건의 감정을 자아낸다. 그 단순함이 보여주는 고귀함이 이 건축물의 본질이다.
순라길로 들어서면서 길 초입 귀금속 건물을 지나자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담장을 따라 이어진다.
가로수가 정연하고 불을 밝힌 팔각가로등이 있는 길은 전설이 남아 있는 길이며 한적하고 스산하다. 좌측으로 작은 공장과 창고, 밥집, 슈퍼가 줄줄이 이어진다.

길은 세월과 역사에 따라 걷는이가 바뀌었다. 순라길은 궁궐과 가까워 한때 내시들이 많이 다녔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다녔다. 일제강압기엔 조선인 통행금지, 일본순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막았다. 해방 6.25 이후에는 행상들이 물건 팔러 다니는 길이기도 했다. 한때 성매매 여성들 문제로도 시끄러웠다. 일제 때 봉익동은 소위 종삼, 집창촌이, 성매매여성-길을 오가며 웃음을 던지다. 팔기도 하여 사회문제가 항시 시끄러웠다.

순라길은 1995년 종로구청이 역사탐방 문화로로 지정했다. 포장도로를 건설하고 보도블록으로 단장하였다.

연인들 밀어 나누며 한적하게 걷는 길(들남길)이 되었다.

창문 넓은 카페따라 걸으면 길 끝에 창덕궁이 나온다. 창덕궁 후문은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1465년 조선 태조는 북악산의 응봉 자락에 궁궐을 세웠다.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조선왕조의 어궁(御宮) 창덕궁의 백미 후원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었다. 후원 안쪽과 옥류천은 후원의 별미다. 인조14년(1636) 소요암을 깎아내고 유상곡수연을 만들었다.

순라길에는 다른 순라길이 있다.

순라길은 길 끄트머리에 자리한 홍어 전문점이다. 낡고 허름한 이 집. 홍어 맛이 좋아 꼭 들리는 맛집이다.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 등장한 후 더욱 유명해졌다. 코가 뻥 뚫리는 홍어와 고추장굴비, 낚지볶음을 판다. 40년 넘게 이 자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주인 김부심(71)씨, ‘어떻게 입소문이 났는지 전국에서 찾아온다. 넉넉한 인심과 정성이 비결인 것 같다’며 모든 반찬은 시골(치악산)에서 무공해 재료로 만들어 공수해와 손님들에게 내놓는다고 말한다.

서순라길을 걸어 끝자락에 이르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홍탁 삼합집 ‘순라길’이 있다. 이 길이 순라길임을 말해주는 상호에 정감이 간다. 메뉴는 말할 것 없이 홍어다.

메뉴판에는 홍어찜, 홍어무침, 홍어회가 적혀 있다. 누구의 필체인지 모르겠지만 천년은 가야할 순라길 맛, ‘홍어’라고 적인 나무판도 걸려 있다.

‘홍어요리’라고 하면 코끝이 뻥 뚫리는 콤콤함이 떠올라 금세 입안에 침이 고이거나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사람들로 나뉜다. 그만큼 맛이 강하다는 이야기인데 홍어요리 입문은 홍탁 삼합으로 하는 것이 좋다. 삭힌 홍어회와 돼지고기 삶은 것, 묵은 김치가 합해 나오는 요리로 3가지 강한 맛이 혀를 자극한다. 그래서 누구는 오케스트라의 클라이막스처럼 격정이 꿈틀대는 맛이라고 했던가. 여기에 주인장이 내미는 명함에 쬐그만 집이지만 맛이 큰 집이라고 적혀있으니 딱 맞는 표현이다.

홍어무침, 홍어탕은 작은 것이 3만6천원, 큰 것이 4만원, 홍어찜은 4만5000원, 5만원이며, 홍어회는 5만원, 55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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