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대 한의과대학(한의학과) 설립에 대한
국립의과대학 학장회의 입장


지난 수년간 산발적으로 제기되어 오던 국립대학교 한의과대학 혹은 한의학과(이하 ‘국립한의대’라 함) 설립에 대한 논의가 최근 정부당국자의 ‘지방 국립대 한의대 설립 가능성’ 발언을 계기로 다시 전면에 등장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한의사협회는 ‘국립한의대 설립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고 몇몇 지방 국립대가 한의대 유치 경쟁에 나서고 있으며 일부 지방자치단체까지 이에 적극 동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국립의과대학 학장회는 아래와 같이 국립한의대 설립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의학의 과학화와 동서의학 융합을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서 우선 국립대 내 한의학연구소 설립을 추진하는 단계적 접근방안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1. ‘국립한의대 설립’ 계획은 의료인력 수급에 대한 면밀한 고려 없이 대학개혁정책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의과대학이나 한의과대학 설립은 우리나라 의료의 수십 년 앞을 내다보고 의료인력 수급의 전반적 정책기조에 입각하여 결정해야 하는 중차대한 사안입니다. 의료 인력의 수급에 큰 영향을 미칠 ‘국립한의대 설립’이라는 정책이 ‘국립대 통합’, ‘대학구조개혁’ 등 대학개혁정책의 수단으로 이용당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국립한의대 설립 문제는 장기적인 의료 인력수급 전망에 입각해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2. 지방 국립대학의 위상을 확대 제고시키는 방편으로 국립한의대 설립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지방 국립대학들은 대학의 위상을 높이고 규모를 확대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의대 설립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의사의 업무가 의사에 비하여 업무의 위험성이 적고 응급 환자가 드문 반면 수익성은 높아 우수한 학생이 한의대에 지원하는 경향이 높기 때문에 지방 국립대로서는 한의대 설립에 강한 유혹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전공과(科)의 설립과 달리 한의대 설립에는 임상교육을 위한 한방병원의 설립과 함께 막대한 추가재정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무리하게 신규로 한의대를 설립하여 자원을 기존 한의대와 분산 투자되게 함으로써 한의학교육의 부실화 소지를 제공하기보다는 기존의 교육체계를 강화할 수 있도록 기존 한의대를 적극 지원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됩니다.

3. 국립한의대 설립은 동서의학의 협진을 촉진하기는커녕 의료계의 갈등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의과대학 및 병원이 한의과대학 및 한방병원과 동일 기관에 병설될 경우 동서의학 협진이 강화될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간의 경험을 돌이켜볼 때 이런 식으로 진정한 의미의 협진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뿐더러 오히려 의료전달시스템의 혼란, 동서의학간의 갈등, 진료상의 마찰, 중복진료로 인한 진료비 낭비 등의 부작용만 확대될 것이며, 이는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듯이 의과대학과 한의과대학, 병원과 한방병원을 지리적으로 분리한다고 해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현대 의료사는 한약계-약업계, 의학계-한의학계, 약학계-의학계 간의 갈등과 분쟁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오랜 갈등의 해소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한의대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일부 국립대들은 목전의 이익에 급급하여 갈등의 불씨를 학내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4.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한의학의 과학화, 표준화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한의학은 인체를 대상으로 투약과 처치를 하는 학문이므로 현대과학이 요구하는 엄밀한 과학성과 윤리성, 효과성이 검증되어야 합니다. 이는 국제경쟁력의 확보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의학의 과학화와 표준화를 위한 그간의 노력을 더욱 가속화해야 하며, 현대의학과의 융합을 통해 궁극적으로 의료일원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정부는 조급하게 국립대에 한의대를 설립하여 한의사의 과잉 배출을 도모할 것이 아니라 한의학의 과학화와 표준화를 우선적 과제로 추진하여 한의학을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5. 국립의대에 한의학 및 보완대체의학 연구소나 대학원 전공단위, 혹은 교실을 도입함으로써 동서의학이 학문적으로 융합되도록 해야 합니다.


한의학과 현대의학 상호간의 학문적 접근, 투자와 진료비의 낭비 예방, 상호간의 불필요한 갈등방지를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두 학문의 융합 발전을 도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국립의대에 한의학 및 보완대체의학 연구소나 대학원 전공단위, 교실을 도입함으로써 학문적인 포용과 학문적으로 융합된 인력양성을 기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우리나라와 동서의학의 유산을 공유하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미국 등 의료선진국들의 접근전략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립의과대학 학장회는 최근 ‘지방 국립대 한의대 설립’ 움직임과 관련하여 조급하게 국립대에 한의대를 설립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1) 기존의 한의대 교육체계를 강화하도록 지원하고, 2) 한의학의 과학화와 표준화를 추진하며, 3) 현대의학과의 융합연구를 위해 국립의대 내에 한의학연구소나 대학원 전공단위 혹은 교실을 설치할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강원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이정희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함인석

경상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이상호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임병용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왕규창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이현철

전북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김선희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이창인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설종구

충북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이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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